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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 Oct 19. 2022

관계에 대한 절망

일기_ 22.1019

제목에 적은 '절망'이란 단어는 사실 와닿지 는다. 왜냐하면 이 절망은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밥을 먹듯이, 세수를 하듯이, 매일 흐르는 일과처럼 관계들도 맞물려 흐르지만

어떤 것도 끈끈하지 않다. 혈연을 제외하고는 없지 않은가 생각될 정도다.

친밀하거나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끈끈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끈끈하다는 것은 조금 다른 것. 몸속을 도는 피처럼, 없으면 내가 죽는 것. 적어도 제대로 살 수 없는 것.

내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열렬하고 힘찬 것. 나와 삶의 지분을 나누고 있는 것.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끈끈하다는 것의 정의가 이러하다면 그런 지복을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랴 싶기도 하지만.

 

끈끈함이 없는 일상을 잘 견디고 있다 싶다가도 한번씩은 아주 힘든 느낌이 든다.

이런 정신적인 공허감을 책으로 달래려 해도 연인 만나기 쉽지 않듯 책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 전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단편 소설집을 읽었는데, 읽은 후 감상은 "그래서 뭐?"였다.

책의 취향을 보면 그 사람의 기질과 성향을 알 수 있다.

나는 시체 해부대를 연상시키는 소설 식의 작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환한 조명 아래 시체를 놓고 낱낱이 해부하는 듯한, 치밀한 묘사들과 설정.

작가의 달필을 감탄하게 하는 문장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얼마 전엔 드물게 산문집 하나를 읽었는데 담박하고 결이 고운 글이었다.

좋았다. 작가의 감성이나 식견도 격조 있다고 느껴졌고 균형감각도 좋았다.

그뿐이었다. 나는 그 산문집의 정서와 작가의 생각에 공감했지만, 그것은

이 텅 빈 유리병 같은 '관계들'의 숨막히는 진공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했다.

뭉크의 비명이 그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비명이 일상적인 것이어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의식을 하든 못하든) 누구나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빈 유리병 같다고 느끼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빈 유리병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어떤 사심도 없이 상대방을 편안하게 바라보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이렇든 저렇든, 그것은 내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그와 나는

'필요 이상의 관계없음'으로 인하여 자유롭고 편안하다.

그럴 때면 대개 이 한 마디로 족할 것이다. "응,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대화는 쌓이지 않고 흘러가지만, 그래야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좋지 않을 때에도 이 빈 유리병은 소환된다.

흘러가야 자연스러운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들에서 그러한 듯하다.

오고가는 대화들은 찰랑이는 물을 만들지 못하고 꽃도 피우지 못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들과 내 얼굴은 비어 있지 않다.

입과 귀도 열려 있다. 그런데 우리의 말들은 쌓이지 못하고 흩어진다.

삼투압으로 스며들어야 하는데 서로가 누구에게도 스며들지 못한다.

우리들의 얼굴은 비어 있다. 빈 유리병처럼.


하지만 유리병은 원래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새삼 슬퍼하거나 연연해할 일도 없다. 원래 아무 것도 없었으니.

나는 다만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병을 채울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채워지지 않아서 다른 것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채워졌다면 스스로 충만할 텐데

비어 있으니 고이지 않는 건지도.

그렇다면 비어 있음을 보는 것은 나의 비어 있음을 보는 것에 다름 아닌가.


계란 규정된 것이 아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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