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활쏘러 간다> 4
'호연지기’란 말이 있다. 이 말을 들으면 신라 화랑들이 산야를 달리며 활을 쏘던 모습이 떠오른다. 푸른 들숨날숨, 그 상쾌하고 시원한 호흡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내게 활쏘기란 그런 것이었다. 나를 현실의 남루함으로부터 또는 나 자신의 초라함으로부터 끄집어올려 거침없고 드넓은 세계로 끌어올려 주는 것. ‘궁사’가 된다는 것은 그런 세계로 진입하는 첫걸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궁사로 인정받는 예식인 ‘집궁례’를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했다. 집궁례는 궁사로서의 신고식 같은 것으로, 선배 궁사님들과 조상님들께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리는 예식이다. 집궁례를 치러야 사대(활을 쏘는 자리)에 서서 활을 쏠 수 있다. 그전에 사대에 오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집궁례를 치르기 전에는 대나무를 세워 화살을 매달아놓은 연습장에서 주살질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주살질을 하면서 사대에서 활을 쏘는 궁사들을 바라보면 그저 멋져 보였다. 일반인들이 연예인을 보면 후궁이 비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런 식의 느낌이었다.
나는 집궁례 날짜를 꼽고 두근두근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집궁례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집궁례를 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활의 기초를 두세 달만 배우면 집궁례를 치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집궁례를 너무 쉽게 치르게 하는 것에 속으로 불만이었다. 활쏘기의 기술만 익히자면 성인 남자 기준으로 두세 달이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신까지 소화시키게 하려면 최소한 6개월은 ‘훈련’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집궁례는 1년에 서너 번은 치러진다. 그러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궁사가 되었고, 지금도 되고 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에는 사원들 이름이 기수별로 적혀 있는데(집궁례를 하고나면 이름을 올린다), 그 수가 크게 느는 법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계산대로라면 엄청 늘어야 하는데?... 선배 궁사님께 슬쩍 여쭤보니 집궁례를 한 뒤 꾸준히 활을 잡는 사람은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하는 궁사가 되었는데 왜? 왜 안 하는데?
그런데 집궁을 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왜 그런지 너무도 잘 느끼고 있다. 궁사가 되는 것과 궁사로 사는 것은 굉장히 다른데, 활은 궁사로 살아야 꾸준히 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활은 꾸준히 쏘지 않으면 배운 것이 모두 소용없어진다. 자전거는 한번 배워두면 죽을 때까지 자전거 타는 법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활은 몇 달만 쉬어도 자기 활을 자신이 당기지 못한다. 꾸준히 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집궁례를 치른 뒤부터의 활쏘기는 온전히 궁사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누가 강제하는 것도 없고 의무도 없다. 본인 시간이 나는대로 연중 아무 때나 활터에 가서 활을 잡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오히려 쉽지가 않다.
보통 생활화할 수 있는 운동들은 외적인 재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역동적인 음악이나 어떤 장치들,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것. 그에 비해 활쏘기는 좀 밋밋한 경향이 있다. 모여서 떠드는 분위기도 아니고, 바깥에서 모임 같은 걸 갖지도 않는다. 집궁례 전후로 동기들 모임만 몇 번, 그 이후에는 각자 자신의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유일하게 자주 하는 회합이 있다면, 활을 쏠 때 두 팀으로 나눠 점심 내기나 간식 내기를 하는 정도다) 그래서 철새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 타 운동에 비해 심심하고 잔재미도 없으니까.
활은 마치 '겉으로는 굉장히 활동적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 같다. 활의 과녁은 궁극적으로 바깥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수 없이 혼자 기운을 낼 수밖에 없다. 각자 생활이 다르니 누군가와 시간을 맞춰 가기도 어렵다. 그래서 후우 한숨을 내쉬며 활터로 달려간다. 나는 아직도 신라 화랑을 생각한다. 말을 타고 달릴 초원이 없으니 내 작은 경차를 말이라 생각하고 활터로 간다. 호연지기의 기상이 어디 벌판에만 있을까. 어깨와 가슴을 펴고 똑바로 서면 머리 위에는 하늘이, 발밑에는 땅이 있다.
‘호연지기’는 활쏘기의 자세를 통해서도 익힐 수 있다. 어깨는 낮추고 허리는 세우고 배는 숨을 모아 팽팽하게 만든다. 허벅지에도 힘을 주어 꼿꼿하게 서야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활을 들어올린 뒤 숨을 멈추고 화살을 당긴다. 앞손은 천하를 밀듯이, 뒷손은 호랑이 꼬리를 잡아당기듯이. 천하의 기운을 내 몸에 끌어들인다는 기분으로 화살을 놓는다.
자세를 바로 갖추는 일이야말로 과녁에 화살을 맞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모든 것이 자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자세가 삐뚤어져 있으면 화살이 아무리 과녁에 잘 맞아도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자세가 한 번 삐뚤게 잡히면 바로잡기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니 명중을 욕심내기보다 자세에 신경 쓰는 게 좋다.
활터에는 실력이 좋은 궁사님들이 여럿 계시다. 물론 그분들은 자세도 아주 멋지다. 국궁 교본에 나오는 그림처럼 활을 잡은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고 표정도 평온하다. 어떤 분은 활을 쏠 때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우스갯말에 '폼생폼사'란 말이 있다. 폼에 죽고 폼에 산다고. 하지만 폼이라는 것이 어찌 허튼 폼을 잡을 때만 쓰일까. 폼(form)은 바른 자세고 기상이며 기본이며 그릇이다. 무엇이든 그 내용물은 그릇의 크기와 모양대로 담기는 법. 그러니 호연지기라는 것도, 담길 그릇(폼)이 좋아야 제대로 스며들 수 있을 거라고, 호연지기도 폼생폼사라고 중얼거리며 활을 잡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