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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수건에 향기로운 추억만 남아

영원히 은은하게

by 이제이 yzeyh




초등학교 3학년 12월 무렵, 날마다 부모님께 투정 부리고 징징댔었다. 터무니없는 징징댐에 부모님은 몇 번 화를 내다가도 끈질기게 매달리는 나에게 아빠는 한마디 하셨다.



“그럼 우리 동 모든 집에 허락 맡아와! 그럼 아빠도 허락할게.”



어린 내가 이 한마디면 수그러들 줄 아셨던 모양이다. 아빠가 내주신 미션을 완수해서 내 진심을 비추느냐, 아니면 아빠의 ‘설마설마’ 하는 마음을 ‘네가 그럼 그렇지’로 마무리 짓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었다. 단순하고 눈치 없었던 어린 나는 쾌재를 불렀다.

‘저것만 하면 된다고..?’ 미션이 너무 쉬워서 바로 행동에 나섰다.




빌라 같이 작은 우리 동은 총 12 가구가 살았다.

나는 하루 날을 잡아 우리 집을 제외한 11 가구의 현관문을 두드렸고 앵무새 마냥 같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저 302호 사는 제이인데요, 저 강아지 키워도 돼요?”

“안녕하세요 아저씨! 302호 사는 제이인데요, 강아지 키워도 돼요? 허락받으러 왔어요.”




10살짜리가 온 집 현관문을 두드려 가며 허락받으러 다니는 모양이 꽤나 당돌하게 비쳤을 것이다.

어린애가 면전에 대고 재촉해서 허락을 구하는데 마음씨 좋은 어른들께선 “어어어으으응.. 그래..”하실 뿐이었다.

그날 막 퇴근하신 아빠께 우리 동 어른들께 허락 다 구했으니까 아빠도 약속 지켜달라 얘기했고 아빤 그저 벙-찐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어린 내가 너를 만나기 위한 최대의 노력이었다.

우리가 처음 마주한 2002년 2월 18일을 나는 기억한다. 아직 제 힘으로 몸도 가누질 못해서 살짝 비틀비틀했지만 기어이 조그맣고 빨간 집을 걸어 나와 나에게 다가왔지. 뽀글뽀글하고 윤기 나는 털에 눈과 코는 새까맸고 갈색 털을 가진 너에게 나는 ‘초코’라는 이름을 지어줬어.






17년간 너와 지냈던 날들이 가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곤 한다. 5년이 흘렀어도 네가 떠나간 3월은 늘 울적하고 잔인한 것 같아.

네가 떠난 이후 초미를 데리고 와 우리 가족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 사이사이에도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너는 어린 나와 같이 자란 쌍둥이 여동생 같은 느낌이고, 초미는 늦둥이 여동생 같아서 똑같은 사랑이어도 그 기본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

서로 쥐어박고 죽일 듯이 싸워도 뒤엔 애틋함이 자리한 여동생과 내가 뭐든 나서서 다 해주고픈

여동생의 느낌.




초미의 장난감이나 간식이나 용품들을 사다 보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다. 너를 키울 때에는 그저 짐승이었고 한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한소리 듣기 딱 좋았지. 취향도 입맛도 뭣도 없는 그저 ‘애완’동물이었어.

지금은 강아지마다 입맛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알레르기도 신경 써서 사료와 간식이 만들어진다.

장난감도 디자인이나 촉감, 재료도 다 다르고 말이야. 애견 카페도 유치원도 많고 동반한 식당이나

호텔도 많고.





너는 17년을 살았어도 누리지 못한 것들을 초미는 눈 뜨자마자 누리고 산다는 걸 깨닫고 나니

우리 초미 호강한다 싶으면서도 초코 네가 1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이 모든 걸 누리고 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닭고기니 양고기니 소고기니 하는 입맛에 따른 사료보다 용품점이나 마트에서 파는 사료와 개껌, 통조림이 전부였던 그땐 어쩔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너도 그냥저냥 살아간 게

아닐까 싶은.. ‘초코는 참 장난감을 안 갖고 놀았어.’라고 말하다가도 무거운 고무 장난감이 네가 들기엔 무거웠을 테고 자연스레 장난감에 흥미가 없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 아이러니하게 참 많은 걸 해줬음에도 참 많이 부족했다.





3월 10일 그 언저리에 넌 간만에 내 꿈에 찾아와 줬다. 이번엔 희한하게 꿈 배경이 네가 자라고 생을 마친 옛날 우리 집이었어. 나도 다시 가지 못할 공간이라 꽤나 반가웠음에도 너에겐 그 공간이 생의 전부였구나 알게 됐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이사 나왔는데 넌 여전히 그 집에 머무르고 있구나.

꿈 안에서 너의 방울소리도 무표정한 얼굴도 현관 앞에 앉아 있는 모습도 다 그대로 반가웠다.





3월 10일이면 엄마가 네 유골함과 액자 앞에 네가 가장 좋아하던 맥심커피 한잔 놔두시는데 잘 먹고 가는 거지?

좀 더 자주 꿈에 만나러 와주라.

언제든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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