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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n 18. 2017

더 랍스터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은 처량한 남자 데이비드, 솔로가 된 그는 도시의 규칙에 따라 커플 메이킹을 해주는 호텔로 들어간다. 호텔에서 그를 비롯한 솔로들은 45일 안에 커플이 되어 사랑을 인정받아야 동물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커플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결국, 커플이 되지 못하고 숲으로 도망치게 된다. 솔로들의 터전인 숲, 호텔과는 다르게 솔로만이 허용되는 곳에서 그는 근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솔로라는 규칙을 어겼을 때, 호텔만큼이나 가혹한 처벌이 따르는 숲에서, 그는 그의 사랑을 지키고 커플이 되어 도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 <더 랍스터>는 이분법으로 만들어진 시스템 안에서 분투하는 개인들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의 수많은 이분법들 사이에 ‘사랑’이라는 가장 다면적이고 무형의 감정을 넣어 ‘사랑’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 속 분투하는 개인들을 보는 관객들에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은 과연 사랑이 숨 쉴 수 있는 곳인지 질문을 던진다.      



- 호텔과 숲의 이분법

 데이비드가 처음 호텔 프론트 앞에 선 순간부터 사랑을 재단하는 이분법들이 쏟아진다. 1과 2만이 존재하고 0.5가 없는 규율의 공간은 호텔의 투숙객들에게 스미며 그들을 옥죄인다. ‘사랑하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는 호텔의 시스템은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어 사람들에게 ‘다름’의 공포를 확산시킨다. 개인들에게는 ‘혼자’의 삶이 얼마나 부족하고 힘겨운지 육체적으로나 시각적으로 학습시키는 것에서부터 숲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사냥’하는 일과를 통해 커플이 되기로 한 자신들의 미약한 가능성을 권력화 해 무자비하게 솔로들을 사냥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동물’들은 사랑 하지 못한 솔로들로 구전되어 전해져 그들의 인생에 각인되어 있다. 

 비정한 여인과의 거짓된 사랑이 처참한 말로에 다다르자 데이비드는 호텔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숲으로 도망치게 된다. 숲은 거짓말처럼 호텔과 정반대의 규율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솔로여야만 하는 공간이며 그렇지 못하면 핏빛 응징이 따르는 곳이다. 호텔이라는 공간이 ‘커플’을 만들어야 하는 공간이면서 모두 같은 문을 가진 단절의 공간을 제공했다면 숲은 광활한 개활지에서 자유로운 만남이 가능하지만 커플이 되어서는 안 되는 모순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데이비드는 근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호텔과 숲은 솔로와 커플이라는 정 반대의 이분법을 가진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둘 중 그 어느 곳도 사람들에게 완벽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않는다. 이 두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공통점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사랑은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타인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 지으며 자신, 그리고 관계를 규정짓는 사회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분법으로 점철된 시스템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스템은 과연 호텔의 서비스라는 이름의 절대자처럼, 숲의 무자비한 리더처럼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영화는 이에 대한 답을 주인공 데이비드를 통해서 전한다.  



    

-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데이비드는 호텔과 숲 둘의 규율을 어기며 두 공간의 시스템에서 도망쳐 나온다. 그는 두 공간에서 모두 저항의 아이콘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호텔에서는 공통점으로 묶인 사랑의 허울을 벗겨내고, 숲에서는 솔로들이 공포로 쌓아올린 불안한 시스템을 처단하고 눈이 먼 근시 여인과 함께 도시로 도망친다. 그렇게 도망친 도시에서 데이비드는 사랑을 위한 최후의 결단 앞에 선다. 

 근시라는 공통점을 가졌던 근시 여인이 눈이 멀게 되자 그는 그녀를 따라 눈을 멀게 하기 위해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을 찾는다. 영화는 그를 기다리는 근시 여인을 비추며 끝이나 그가 돌아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 같다. 이는 영화 제목이 영화의 시스템을 대표하는 공간들 대신 <더 랍스터>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수많은 랍스터 중에 ‘그’ 랍스터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다는 가냘픈 생각에 이어서 데이비드라는 인물이 ‘귀족적인 피’를 가진 ‘한 입 거리’ 랍스터 같은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데이비드는 커플이 되지 못했을 때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귀족과 같이 푸른 피를 가진, 장수하며 번식을 계속해 나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한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그가 얼마나 시스템에 속하고 싶은지가 담겨져 있다. 그는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 공통점을 만들어 사랑을 꾸며내기도 하고, 근시에 집착하다 결국 자기 손으로 눈을 찌를 상황까지 자신을 내몬다. 

 하지만 그는 거짓된 공통점의 말로를 접한 사람이자, 거짓 사랑을 시도하는 데에 있어서도 자신의 변화를 최소화 하는 ‘비정한 연기’를 택했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치인 순수한 공통점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런 그는 결국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지만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는 한 개인이었고, 그런 한 개인은 이분법에 의해 ‘다름’으로 정의되면 시스템에 의해 한 입에 삼켜질 것이다. 랍스터가 되고 싶은 데이비드의 고고한 모순은 “도망치는 곳에는 낙원이 없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도망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변화’없는 도피는 낙원이 아닌 또 다른 굴레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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