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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n 25. 2017

레볼루셔너리 로드

너도 북어지

 뉴욕 교외 지역,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가장 아름다운 집, 그리고 모두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부부인 에이프릴과 프랭크. 처음 사랑에 빠진 달콤한 순간은 빠르게 잘려나가듯 지나가고 서로에게 고함치며 싸우는 둘의 모습이 이어지는데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에이프릴과 프랭크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권태와 그 곳에서 빠져나오려 애쓰는 둘의 모습을 그립니다.      



- 일상의 무게

 회사로 출근한 프랭크를 보내고 집안을 정돈하던 에이프릴은 프랭크의 옛 사진들을 보게 되는데요. “인생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싶다”던 자신이 지금껏 보았던 가장 멋있는 남자였단 프랭크와 그를 사랑한 자신을 되찾기 위해 파리로의 이민을 계획합니다. 

 한편, 30살 생일을 맞은 프랭크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일한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권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일탈이라는 이름으로 불륜을 시도하는데요. 집으로 돌아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며 둘의 미래를 꿈꾸는 아내를 보자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에이프릴에게서 이민 계획을 듣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둘은 현실과 이상의 각각의 지점으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때의 둘은 현실에 굴복해버리고 서로를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 ‘파리로의 이주’로 함께 뜻을 모읍니다.

 파리로의 이주를 계획해나가면서 둘은 회사에 그리고 주변 이웃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데요. 에이프릴과 프랭크는 자신들의 미래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늘어놓으면서 사람들의 걱정 섞인 응원에 스민 동경을 보며 그들을 비웃습니다. 프랭크는 자신의 현재의 느낌을 말하며 처음 전쟁터에 갔을 때의 짜릿함을 이야기 하는데요. 긴 행군 행렬 속에서 “이게 ‘나’이고 이것이 ‘진실’이다.” 라고 되뇌던 그의 모습은 모두 같은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삶을 정의하려 하는 부부의 모습과 같습니다. 또 두 사람이 남들과 다름으로서 생기는 얄팍한 우월함에 도취되어있다는 것도 이웃들을 향한 그들의 조소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하지만 곧 공허하고 희망 없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둘의 계획은 현실의 암초들을 만나서 휘청거리게 되는데요. 프랭크의 승진 기회와 에이프릴의 임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두가 바라는 행복의 조건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둘 앞에 주어진 것입니다. 영화는 떠나기 위해서 임신 중절을 하겠다는 에이프릴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몰며 파리 이주에 반대하는 프랭크의 얼굴 절반에 조명으로 그늘을 드리우는데요. 아마 그 그늘은 실패가 두려워 떠나지 못하는 그의 불안일 것입니다. 한편 에이프릴은 밝은 곳에서 계속 그에게 원하는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진실된 삶을 피력합니다. 

 다른 삶을 꿈꾸지만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이 의미 없는 인생에 메어버린 휠러 부부. 프랭크는 멀어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외도 사실을 밝히며 용서를 구하지만, 에이프릴은 그 사실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자신을 보며 그를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강박적으로 사랑을 원하는 프랭크,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남아있지 않는 에이프릴은 마지막으로 둘의 사랑을 놓고 크게 싸우게 됩니다. 

 다음 날, 둘은 불안하도록 완벽한 아침 식사를 하며 언제나처럼 현관을 사이에 두고 작별합니다. 그 후, 프랭크가 출근한 집에서 에이프릴은 홀로 임신 중절을 시도하다 과도한 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들을 비극으로 이끈 것은 어쩌면, ‘매일 같이 완벽했던 아침’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큰 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시 속의 관성이 관념이 되고 그 관념이 삶이 되면 더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현실에 굴복하는 사람들도 한숨과 눈물짓는 무거운 일상의 무게. 그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 친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 그 무게란 더 답답하고 무겁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프랭크는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의 꿈에서 점점 멀어지며 부, 권력, 동질감으로 뭉친 유대 등의 탈을 쓴 현실에 완전히 굴복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면, 에이프릴은 프랭크에 투영한 욕망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공허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자신의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임신 중절까지 시도하며 끝까지 현실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에이프릴 어쩌면 그녀가 원했던 현실에서의 도피를 이뤘을지도 모르겠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삶‘에서의 행복을 찾지 못하며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 너도 북어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홀로 남은 프랭크가 아닌, 부동산 중개인 부부의 집을 비추면서 끝나는데요. 에이프릴과 프랭크가 살던 집에 어떤 부부가 어울릴지 고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 집에 사는 ‘교양 있는 젊고 멋진 부부‘가 현대 도시의 삶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교양 있는 젊고 멋진 부부‘는 ’바비와 켄‘처럼 모두가 진짜 원하는 삶을 두고 희망과 꿈도 없는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의 시각적인 보상입니다. 아름답고 안정적이며 완벽한 그들을 보며 자신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이라는 체제 밖에 있는 정신병 환자 ‘존’은 휠러 부부의 공허를 꿰뚫어 보며 그들의 내부를 찌르는 유일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사람들이 ’평범‘하다고 믿는 도시의 일관된 삶을 내파하려는 이들을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으로 어떻게 분리시키며 ’정상적이지 않은 정상의 삶‘을 공고히 하는지 보여줍니다. 영화는 ‘모두가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가치도, 그리고 자신을 부정하고 인내해가면서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미친‘사람 존을 통해서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며 흔들리는 ’바비와 켄‘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고, 교과서에서 한 번쯤 보았던 시, 최승호 시인의 <북어>가 떠오릅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치지’ 못한다며 동정하고 조소하며 그곳으로부터 헤엄쳐 가려 했지만 결국 도시의 공허 속에서 마른 북어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라는 귀가 먹먹한 부름은 영화를 본 우리에게까지도 전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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