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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06. 2017

목소리의 형태

우정이라는 공명



“너와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귀가 들리지 않는 니시미야를 왕따 시켰던 이시다가 시간이 지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꺼낸 말이다. 그는 니시미야를 만나 ‘용서’가 아닌 ‘친구’이기를 부탁했다.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분노와 용서보다 깊은 ‘친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 아픔을 마주할 때

 느리고 불편했던 니시미야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왕따 사실이 밝혀지고 주동자를 찾아내기 시작하자, 왕따를 시켰던 자신들의 죄책감과 분노를 이시다에게 돌린다. ‘가해자’라는 명찰을 단 왕따의 삶은 더 가혹했다. 그런 이시다를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돌봤던 것은 다름 아닌 니시미야였다. 그의 책상을 닦고 있는 니시미야와 언쟁을 벌이다 몸싸움까지 번지게 되었던 그 날. 그리고 그 후 자신의 책상에 적힌 ‘사라져 버리라’는 글을 보았을 때, 이시다는 니시미야가 자신이 느꼈던 마지막 절망으로부터 그를 구하려 필사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니시미야가 전학을 가버려 그녀에게 손 한 번 내밀어 보지 못한 채 이시다는 다시 혼자가 된다.

 수 년 후, 자살에 실패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이시다는 우연히 만난 니시미야에게 ‘친구’이기를 희망한다. 그녀에게 용서를 넘어선 ‘친구’이기를 청했던 것은 아픔을 마주했던 시간이 짧게나마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소리 없는 삶을 사는 니시미야와 비슷하게 ‘가해자’라는 명찰을 달고 ‘얼굴’없는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그 아픔이 용서라는 찰나로 지나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무의식중에 절망 속에 있는 단 둘이라는 동질감도 용서가 아닌 ‘친구’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용서는 위아래가 있는 말이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으니까.


 둘의 만남 이후로 영화는 두 피해자를 중심으로 가해자, 방관자들을 모은다. 매일 같이 마주치는 ‘한 때’ 친구였던 그들. 그들이 다시 평화로웠던 예전 모습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상처를 꺼내 아픔을 마주하는 과정은 상처가 처음 시작되었던 때보다 더 쓰라렸다. 바뀌기 위해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시다와 친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멀어진다.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영화 속에서 시각적으로는 황홀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해피 엔딩으로 귀결된다.

 각기 다르고 예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고, 어느 부분은 서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기도 한 그들의 해피 엔딩에는 ‘왕따’라는 아픔을 마주하고 우정이란 이름으로 책임지려 한 울림이 있다. 울림의 크기나 방향이 서로 달랐을 뿐, 모여든 울림들은 조율 끝에 화음이 되고 그것이 우정이란 이름으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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