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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Feb 12. 2018

백엔의 사랑

아프니까, 레프트 훅!

 서른두 살 ‘이치코’(안도 사쿠라)의 삶의 반경은 그렇게 넓지 않다. 대학 졸업 후 쭉 백수 상태로 부모에게 얹혀살아온 그녀는 집에서 조카와 게임을 하거나, 밤늦게 자전거를 끌고 편의점 100엔 샵을 방문하는 것이 하루의 전부다. 

 이혼 후 조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여동생은 자신의 처지보다 못한 언니의 무력한 모습에 울화가 터지고, 끝내 둘은 온 가족 앞에서 머리채를 잡고 대판 싸운다. “둘 중에 하나가 나가!” 라는 엄마의 절규를 듣고서 이치코는 홧김에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소위 N포 세대인 그녀의 독립은 쉽지가 않았다. 보증금조차 없는 그녀는 그마저도 엄마의 지원을 통해 겨우 방 한 칸을 구해 집을 떠난다. 이력도 능력도 없는 이치코는 이번엔 일을 구하기 위해 매일 같이 찾던 100엔 샵으로 향한다.      




- 아프니까, 레프트 훅!

 이치코는 그렇게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이력도, 경력도 바라지 않는, 초심자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일. 영화 속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사회가 그어 놓은 마지막 방어선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그곳에 안착했다. 

 영화 속 편의점이 사회의 마지막 방어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일하는 자들과 쫓겨난 자들의 만남에서 명확해진다. 매일 밤 폐기된 음식을 가지러 오는 4차원의 노숙자 여성이 있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돈을 훔치다 쫓겨난 경력이 있지만, 점장이 원칙을 어겨가며 폐기된 음식을 주어 알게 모르게 거두고 있다. 이치코는 쉬는 시간 담배를 피우다 노숙자인 그녀를 만난다. 이 일마저 손에 쥐지 못한 사람의 말로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연민한다. 그러면서도 돌아와 설 계산대가 있다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안도한다. 그것이 그녀가 치근덕거리는 변태 유부남 동료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점장 사이에서 계산대를 지킬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상품의 공간이다. 상품을 위해 24시간 무대처럼 빛을 밝히고 있는 공간. 영화의 시작, 가판대에 있던 상품들이 배우의 이름으로 변하며 캐스트들이 소개된다. 영화는 ‘경제활동’을 필두로 사람됨을 명명하는 시대 속 N포 세대를 그려낸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그렇기에 가격표가 없는 그들에 삶에 핀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게 이력도 경력도 없는, 우리가 사회적인 낙오자로 일컫는 이치코도 상품의 공간에서 최저시급이라는 가격표를 단 채로 최선을 다해 기능한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쓰는 곳이 있다. 매번 퇴근하는 길에 만나는 복싱장. 그 곳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복싱 연습을 하는 한 남자를 바라보는 일이다. 그 남자는 이치코의 편의점에서 ‘바나나 맨’이라 불린다. 매일 바나나만 사가는 그는 어느 날 이치코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이미 마음이 그을 향해 있던 이치코는 신경 쓴 옷을 입고서 데이트에 나간다. 그리고 데이트가 끝나갈 무렵, 왜 나 같은 사람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냐고 ‘바나나 맨’에게 묻는다. 그는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이라는 무심한 말로 데이트를 마무리 짓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치코와 카노유지(바나나맨)은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인연으로 발전한다. 나이가 차 마지막 경기가 될 복싱 경기에 이치코를 초대한 카노. 그가 패배를 맛봤던 링은 이치코와 카노의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흔들리는 링 위의 카노는 수많은 도전과 그 끝에 남은 패배에 좌절했고, 링 위의 그의 처절한 싸움을 바라본 이치코는 흔들리는 두 사람의 사투의 긴장과 그 끝에 혼신을 다한 개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날, 이치코는 함께 복싱을 보러 간 변태 유부남 직장동료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어차피 난 가치 없는 인간이걸랑” 이라고 말하는 인간이었다. 

 이치코는 그 날 이후로 카노가 사라진 복싱장에서 복싱을 시작한다. 집에서 나와 곡절을 겪으며 사람들에게 치이며 밑바닥까지 찍은 그녀는, 그녀가 본 유일하게 반짝이는 순간을 따라간다. 그녀가 복싱을 시작하고 며칠 뒤, 술에 잔뜩 취한 카노가 100엔 샵을 찾아온다. 유부남 동료와의 관계를 오해해 혼자 상처를 받았던 그였다. 

 이치코는 만취한 그를 집으로 데려와 서로의 감기를 나누며 전보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다. 카노에게서 감기를 옮아 크게 앓아누운 이치코에게 카노는 고기를 구워준다. 좋은 것은 크면 클수록 좋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진 그는 한 번에 먹기 힘들 정도로 큰 고기를 덩이 째 이치코에게 건넨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이치코. 먹을 수 없는 크기에 울고 웃으며 고기를 힘겹게 뜯는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의 고된 ‘먹고사니즘’을 함축한 듯하다. 그 후 카노는 다른 여자를 만나 이치코에게서 떠나갔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복싱에 집중한다. 

 복싱에서 프로 선수로 도전할 수 있는 나이는 여자 기준 32살. 이치코는 편의점을 뒤로 한 채 프로 선수에 도전한다. 편의점의 마지막 날, 바뀐 점장의 계속되는 비인격적 대우에, 노숙인 여성이 편의점 강도짓을 한다. 돈을 모조리 털어 나오다 이치코를 만난 여자는 이치코에게 금화 초콜릿을 선물이라며 주고 골목의 어둠 속으로 달려간다. 이 금화 초콜릿은 영화 초반에 우울증을 앓고 있던 점장이 변태 유부남 동료였던 노마에게 주었다가 되돌려 받은 것이었다. 그 초콜릿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발로 편의점을 떠났다. 어쩌면 얼마 하지 않는 그 작은 초콜릿이 그들이 그곳을 떠날 작은 발단이자 노잣돈일지도 모른다. 

 이치코의 프로 데뷔일. 그녀의 이름이 불려지고 배경음악으로 100엔 샵의 CM송이 흘러나온다. “왜 하필 이런 노래냐”고 묻는 관장의 말에, 그녀는 “전 100엔짜리 여자거든요.”라고 답한다. 사회로 뛰쳐나와 치이고 구르며 겨우 얻어낸 자신의 값어치 100엔. 이치코는 자신의 이름 값 100엔을 걸고 링 위에 오른다. 

 결과는 예상대로 참혹한 패배로 끝이 난다. “할래요, 할 수 있어요.”라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덤벼도 그녀는 결국 패배했다. 경기가 끝난 그녀를 기다리는 카노. 이치코는 그에게 “딱 한 번만이라도 이겨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른두 해를 살면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그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의 평범한 삶은 계속된 패배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서로 막 때리고, 끝내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당한 사투를 벌여보았다. 그리고 삶이 쏟아내는 ‘원래 그런거야’와 ‘100엔’으로 매긴 값어치에 강렬한 레프트 훅을 한 방 먹였다. 삶이 아파서 밖으로 나서지 못했던 그녀가 삶에게 겨우 한 방 먹인 순간, 그 순간은 앞으로의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패배들을 과정으로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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