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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May 10. 2018

라이크 크레이지

사랑은 닳았다.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기입니다. 또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나(펠리시티 존스)와 제이콥(안톤 옐친)은 대학 수업 중에 우연히 서로를 발견한다.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내며 사랑으로 빨려든 둘은 빠르게 서로로 가득한 일상을 쌓아간다. 애나가 첫 만남에서 그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제이콥에게 읽어줬던 것처럼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제이콥은 애나를 위해 의자를 만들어 선물한다. 영화의 제목이자 둘의 사랑의 표어 “Like Crazy"는 의자 아래에 제이콥의 손으로 새겨져 애나의 공간 안에 심어진다.

  학교가 있는 LA에서 사랑을 이어가던 둘에게 영국에서 온 유학생인 애나의 비자가 만료될 것이라는 예정된 이별이 다가온다. 두 달 반가량의 짧은 이별을 위해 떠난 여행, 그 곳에서 제이콥은 ‘인내’라는 말이 새겨진 팔찌를 애나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애나는 비자 기간을 어기고 여름 내내 함께 있을 것을 결정한다. 그때는 둘 다 몰랐다. 팔찌의 적힌 ‘인내’의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 사랑은 닳았다.

  비자 기간을 어긴 애나의 미국 입국이 막히면서 둘은 갑작스럽게 기약 없는 장거리 사랑을 시작한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없는 일상은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거리는 낮과 밤의 시차만큼이나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지친 하루의 어느 밤, 수화기 너머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때 감정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서로가 그리운 둘이었다. 피부가 닿는 거리에서 전화로, 전화에서 메일로 멀어져가던 둘은 다시 영국에서 만난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사랑은 불이 붙었다 닳아간다.

  시간을 내 애나를 만나러 영국으로 온 제이콥은 그녀의 일상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다. 첫 만남에서 애나의 방을 찾아갔던 일이 서로의 공통점을 나누었던 시간이었다면, 자신이 부재한  애나의 일상을 방문하는 일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귀를 맞춰 돌아가던 톱니였던 둘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둘의 사랑은 닳아간다.

  애나는 둘이 떨어져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한다며 어렵게 한 마디를 땐다. 하지만 자기 없는 애나의 일상 속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제이콥에게는 그녀의 말이 사랑의 변질처럼 느껴졌고, 묘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렇게 닳아진 사이만큼 그 공간에는 다른 사랑이 자리를 채운다.

  제이콥에게는 헌신적인 직장동료이자 연인 사만다(제니퍼 로렌스)가 생겼다. 그녀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는 제이콥에게 먼 곳에서 들린 메아리처럼 애나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우리가 사랑했던 감정이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린 함께 있어야해” 라고. 그 부름은 제이콥의 일상 밖으로 멀어졌던 애나와의 사랑의 기억을 다시 돌려놓는다. 그렇게 둘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멀어져버린 거리를 좁히려한다. 그러나 다시 비자 문제에 가로막힌 둘은 길을 잃는다. ‘다시 만나기만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사랑은 목적을 잃자 시장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처럼 횡설수설 엇갈린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의심하고 질투하며 날선 말들을 내뱉는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잘려나가는 듯했다.

  정말 끝인 줄 알았던 관계가 다시 애나의 마음에 붙어 오른 건 제이콥의 흔적이 파여 나가는 순간이었다. ‘인내’라고 적혀진 팔찌가 끊어져 버리고, 제이콥이 선물한 의자가 그녀의 일상에서 밀려났을 때, 그녀는 일상에 자리했던 그의 무게를 느꼈다. 가벼워졌다기 보다는 외로워진 애나는 내가 바뀌어야 하는 사이먼과의 사랑 앞에서 다시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이콥에게 연락을 한다.

  그리고 비자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자신의 일상을 던져두고 LA를 찾아온 애나. 몇 년 전 받지 못했던 꽃을 받아들고 제이콥의 일상으로 첫 발을 디딘다. 이제 그 공간에서의 이질감과 어색함은 애나의 몫이다. 애나는 제이콥에게 함께 샤워를 하자고 말한다. 비자문제로 헤어지기 전 둘이 떠난 여행에서 애나와 제이콥이 한 욕조 안에서 물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다면, 둘은 아무 말 없이 쏟아져 내리고 흘러가버릴 무심한 물 아래에서 몸을 안는다. 다시금 찾은 서로의 온기, 그렇지만 떨어진 시간동안 닳아진 사랑에는 더 이상 단 맛은 없다. 돌아온 시간만큼의 씁쓸함이 남았다. 안아도 따뜻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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