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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19. 2018

빅 식

든 자리는 몰라도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후기입니다. 또한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고의 작은 스탠드 업 코미디 바에서 ‘무대 작업 한 번에 5분 씩’ 무대에 서는 코미디언 ‘쿠마일’(쿠마일 난지아니).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무대에 한 관객의 환호가 끼어든다.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에밀리’(조 카잔)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다. 에밀리가 쿠마일의 세계에 불쑥 환호를 지르며 들어왔다. 에밀리도 즉흥적인 자신에게 놀라 관계를 밀어내려 하지만, 이미 불이 붙은 사랑을 혼자서 끄기엔 쉽지 않았다.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정체성’이었다. 유구하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져 온 ‘문화’라는 이름의 습관. 파키스탄 출신의 쿠마일은 ‘파키스탄 사람과의 정략결혼’이라는 운명을 쓴 채로 살아왔다. 자신에게 맞는 옷은 아니었지만 불편하지 않았으니 계속 입고 있었다. 그런데 에밀리를 만나면서 ‘파키스탄’이라는 옷을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사랑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가족에게서 추방당한 채 에밀리와 살거나, 아니면 에밀리를 한 때 뜨거웠던 사랑으로 기억하는 것. 그에게는 별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예상대로 이 일은 두 사람이 크게 돌아서는 사건의 발단이 된다. 그리고 곧이어 쿠마일은 에밀리의 삶 전부를 책임지는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타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에밀리가 독감으로 입원하게 되자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에밀리를 혼수상태로 만든다.      



- 든 자리는 몰라도     


  쿠마일은 병원의 말대로 의도된 혼수상태가 금방 끝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에밀리의 병은 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그녀의 혼수상태는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되었다. 딸이 입원했다는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온 에밀리의 부모님과 쿠마일은 에밀리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없는 시간을 함께 견뎌낸다. 

  에밀리의 부재는 그녀를 둘러싼 관계들에게 큰 비극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녀의 병이 나아가듯이 그녀의 부재로 인해 크게 조각났던 관계들도 다시 붙는다. 영화 <빅 식>은 부재의 시간이 증명하는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쿠마일은 그녀가 없는 시간동안 그녀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깨졌던 상처 사이로 다시 사랑이 차오른다. 자신의 딸을 혼수상태로 만드는 것에 동의한 ‘상처를 주고 떠난 딸의 전 남친’을 이해해가는 에밀리의 부모님과 쿠마일의 관계도 부재한 존재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에밀리의 아빠의 과오로 인해 벌어진 에밀리의 엄마와의 부부관계도 에밀리의 부재 동안 차츰 아물게 된다. 

  옛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여놨다가 그가 홀연히 사라져버렸을 때, 그 자리는 처음과 같은 빈 자리가 아니라 ‘난 자리’가 된다. 부재를 통해 증명되는 존재의 무게는 쿠마일이 정략결혼이라는 1400년간 이어져 온 파키스탄 문화와의 싸움에 이길 수 있는 힌트를 준다. 그는 정해진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이 되어버리는 극단적인 상황 이전에 자신의 존재를 가족에서 비워낸다. 뉴욕으로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빈자리에 불쑥 자리를 채우고 앉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떠나버린다. 고집스럽게 내려온 관습이 사랑하는 사람의 빈자리를 느끼며 허물어진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밀리에게 쿠마일은 그 동안에 차오른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에밀리의 시간은 헤어진 그 날에 멈춰있다. 그 때는 쿠마일과 함께 하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쿠마일이 부재의 시간을 지나 변했더라도 두 사람의 시간이 같지 않았기에 에밀리와 쿠마일의 마음은 단 번에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그는 뉴욕으로 떠난다. 하지만 영화의 끝, 두 사람은 처음 만난 그 때처럼 쿠마일의 무대에 환호와 미소로 에밀리가 끼어들며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아마 에밀리 또한 쿠마일의 부재 동안 대체할 수 없는 그의 존재를 강하게 느꼈으리라. 서로가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이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하늘에서 내린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미래를 써나가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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