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이름을 불러주는 일

by 해니

그녀의 이름은 브랜디.

겨우 몇 번, 그것도 몇 달에 걸쳐 한 달에 한 번씩 만난 게 전부지만 그녀는 우리의 얼굴을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그녀의 이름은 특이하게도 칵테일 이름이다. 특이한 이름 덕도 있지만 우리를 만날 때마다 반짝이던 깊은 눈빛,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한 눈빛이 머리에 박혀 이름도 단번에 외우게 됐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렀을 때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Oh, you remember my name!" 소리치고 방방 뛰며 나를 끌어안던 그녀의 작은 품. 각각의 이름들엔 참 많은 서사가 담긴다. 그녀의 이름도 마찬가지. 가족에게 상처받고 버림받아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는 브랜디. 사실 그의 본명은 브랜디가 아니다. 가족의 이름을 물려받았었지만 그 이름이 싫어 스스로 새 이름을 택했다. 그러니까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새 사람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이름인 것이다.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는 우물 안 개구리로 자란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에게 울타리가 되어야 했을 가족들은 그녀를 상처 주고 방치했다.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기댐직하지 못했던 곳에서 상처와 함께 자라온 그녀는 끝내 가족을 뒤로하고 집을 나왔다. 자란 만큼 상처도 커져있던 그녀에게 방법은 그뿐이었다. 가족을 만나지 않은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이제 그들을 용서하고 싶다고 했다. 오늘은 그 사람들을 용서해야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지, 매일 마음먹는다고. 그 다짐이 쉽지 않아 마음이 약해질 때면 여전히 화가 나고 그들이 증오스럽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도 여전히,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기도한다. 브랜디란 이름이 가진 의지처럼,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도 그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피게 웃는다.


이름을 기억하여 불러주는 일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대학생 시절부터 너무 좋아했던 시가 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고, 이름은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사이가 되면서부터 서로의 마음에 작은 공간이 하나 생긴다고. 너무 작아 있는지 없는지 알 수조차 없는 공간일지라도, 그 공간이 남아있는 한 나에게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번 잠깐씩 만나 대화하는 사이일지라도,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길 모퉁이를 서성이다 '오늘도 만났구나' 하며 반가움을 표하는 사이일지라도, 얼굴을 알아보고 단번에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일은 '지난 한 달 동안 너를 잊지 않았어. 너는 나에게 이름을 기억할 만큼 의미 있는 사람이야.'를 말없이 전해주는 방법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바라는 가장 근본적인 건 뭘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름으로 불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것. 홈리스로 길 위를 헤매며 오늘 하루 배 채울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 그들에겐 어쩌면 어려운 것. 그건 그저 하나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일 지 모른다. 그저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누군가에게 의미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 말이다. 홈리스 피플은 많은 결핍에 놓여있지만, 사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결핍은 바로 그것, '위협적인 존재 혹은 도움이 필요한 대상' - 그보다 더 깊게 자신을 봐주는 누군가와 '사람답게' 대화하는 일일 수 있다. 때때로 대화할 컨디션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홈리스들을 만나도 막상 대화를 시작하면 또렷한 정신으로 할 말을 쏟아내는 이들을 본다. 하루에 몇 명씩이나 그들에게 말을 걸어올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하는 가장 쉬운 질문들을 그들은 한 달에 몇 번이나 받아볼까. 이름을 물어보는 일은, '나는 너를 알아가고 싶다'는 가장 쉬운 표현이자 시작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부르는 일은, '나는 너를 기억한다. 너는 나에게 아무나가 아니다'라는 표현인 듯하다. 한번 들으면 잊기 쉽지 않은 그 이름을 기억한 작은 일이 브랜디에게 그토록 기쁜 일이었던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브랜디를 마주친 몇 달 전 어느 날, 여자 홈리스들에게 나누어 줄 물품이 똑 떨어져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했다. 그녀는 가뿐히 괜찮다고 말했다. 너를 만난 것만으로 오늘 하루가 기쁘다고 했다. 다음 달 그녀를 생각하며 준비해 간 산뜻한 티셔츠에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명랑한 그 셔츠의 색감보다 '너에게 아무것도 못 줬던 걸 기억하고 사 왔다'는 말 한마디에 그녀는 더 행복해 보였다. 그다음 달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달 받아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났지만 깨끗하게 유지된 걸로 봐서 아껴 입은 모양이었다. 우리가 오는 날인 걸 알고 그 옷을 꺼내 입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기뻤다. 그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그녀도 조용히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너희를 기억하고 기다렸어!’


브랜디는 만날 때마다 ‘너희를 만나는 게 내 하루를 기쁘게 해’하고 말한다. 우리도 그렇다. 대단한 걸 해주는 것도 아닌데 만날 때마다 200% 반가움을 표시하는 그녀 덕에 하루가 더 의미 있다. 만남이 많아질수록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된다. 그녀도 우리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간다. 우리의 사이가 도움 주고 도움받는 일직선 모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사람 대 사람으로 친구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우리가 그녀의 칵테일스러운 이름을 기억했다는 데 있다. 꽤나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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