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밝은 밤>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한 지연은 희령으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열 살 때 연락이 끊긴 조모와 만나게 되고, 자신을 닮은 얼굴을 한 증조모의 삶과 이야기를 조모로부터 들으며 엄마와 자신의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에 대하여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간 최은영의 단편소설은 많이 읽었지만, 장편소설은 처음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읽었다. 앞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고 서평을 읽은 터라, 『밝은 밤』에서 읽고 쓰는 세대간의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최은영이라 하면 굉장히 젊은 작가임에도,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내용이 나올 줄은 몰랐다. 현재, 그러니까 화자인 지연의 이야기가 중심이 아닌 삼천(증조모)과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로부터 내려온 할머니와 희자의 우정은 읽는 이의 가슴을 따뜻하게 함과 동시에 아릿하게 한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작가들이 모녀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권여선 작가의 「일주」, 이서수 작가의 「AKA 신숙자」 등등, 여성 작가가 문학의 주류 작가로 대두되면서 그간 눈물나는 부정, 일만 하다 돌아가신 가엾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문학이 그려왔다면, 이제는 어머니의 사랑, 그를 넘어서서 그에 대한 애증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여성작가를 꿈꾸는 나로서는 이런 변화가 기껍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딸들에게 있어 어머니란 그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어쩔 때는 남보다도 더 밉고 어쩔 때는 한 없이 희생하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내게 끊임없이 부채감을 주는 미운 사람처럼도 느껴진다. 밝은 밤에서도 엄마에게 잘해주려 하지만 버럭 화를 내버리고 마는 지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딸들은 엄마의 강한 모습, 비겁한 모습 등, 다양하겠지만 그래봐야 한 면밖에 보지 못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마는 완성된 어른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자라서 돌아보면 엄마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구나, 지금의 나이가 그렇게 강인한 나이가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으며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최은영의 밝은 밤을 통해 어머니 세대의 다른 모습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어머니(할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증조모),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고조모)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그저 노쇠하고 쇠락해가는 노인처럼 보이는 그들의 삶이 바다에서 통통 뛰는 고무공처럼, 찬란한 날이 있었음을 재확인한다.
내가 최은영 작가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여성간의 연대가 뚜렷하다는 점인데, 이번 소설에서도 여성들의 연대가 빛나서 참 좋았다.
증조모는 할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대 군인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던 건 너희 아버지 덕분이라고. 그대로 병든 어머니 곁에 남았더라면 자신도 동네의 힘없는 집 여자애들과 함께 끌려갔으리라고 말이다. 증조모는 할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증조부가 가장 최악이었던 순간마다.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나를 구했어. 그래도 너희 아버지는 나를 구했어. p.53
(초략)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다시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얘야⋯⋯ 우린 그렇게 다시 만났던 거야.” 할머니가 내게 말했다. p.56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중략)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중략) 엄마의 말대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그런 식의 생각은 오히려 그녀를 더 화나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재능. 부당한 일은 부당한 일로, 슬픈 일은 슬픈 일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마음으로 느끼는 재능. p.64-65
“백삼십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먼 옛날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p.109
─ 사람들은 기런 걸 좋아한단다. 아저씨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영옥이 너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천하다고 생각하니? 할머니가 고개를 젓자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영옥이는 씩씩하고 밥도 잘 먹고, 크게 웃고 공도 잘 차고 달리기도 잘하지. 희자랑도 친하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 듣기 좋구나.
─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 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희자두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p.132-133
─ 내래 어릴 적에 소설 읽어주던 이들이 있었다이. 책방에서 『홍길동전』두 읽어주구 『사씨남정기』랑 『임진록』두 읽어주구. 내래 기걸 참 좋아했더랬어. 넋을 놓구선 이야기를 들었다이. 어마이가 이야기 좋아하믄 가난해진다고 해두 어쩔 수가 없었다. 기게 참 좋았더랬어. 그 말을 하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p.223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p.270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 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p.284
“어릴 때,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그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갯강구가 정답게 느껴졌어. 속으로 불렀지. 갯강구야, 하고.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을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p.324
─ 가끔은 희자 너레 새가 되어 꿈에 나온다고 하셨더랬어. 아주 잘생긴 새가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걸 본다구. 마음이 벅차서 ‘새야, 잠시 내려오갔어?’ 말을 붙이면 그 새가 가지를 딛고서 아주 높고도 먼 곳으로 날아간다는 거야. 그러면 잠시 슬픈 마음이 들다가두,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래. 눈물이 날 만큼 기쁘더래. p.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