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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암 선고를 받았다. 내내 지독한 우울증 탓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막상 의사 입으로 암 말기입니다.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라는 말을 들으니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 난 어떡하면 좋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어떡하면 좋지. 치료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건 둘째 치고,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엄마? 아니야, 엄마는 안 그래도 오빠 때문에 힘들다고 하시는데. 아버지?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지방에 있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곧장 오시지도 못하고, 마음만 아파하실 거다. 그럼? 태준이? 태준이한테 이야기하면 될까? 태준이는 대학교 때 만나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내 곁에 함께 있지만, 그런데도 태준이에겐 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진료실을 빠져나와 병원 복도를 털레털레 걸으며 눈물이 나올까 숨을 꾹 참고 걸었다. 복도가 어찌나 긴지 암으로 죽기 전에 숨 막혀서 죽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라 죽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오래 숨을 참아본 적이 없는데. 옷장에 숨어 오빠가 나가길 기다리던 때에도 숨을 참지 못해 들켜서 엄청나게 맞았다. 그런데 내가 해냈다. 꿈이라서 기묘하단 생각 대신 뒤지기 전에 한 번은 해내는구나 싶었다. 병원 앞 건널목이 꼭 요단강 건너는 건널목 같이 느껴졌다. 휴대전화를 꺼냈다. 누군가에게 연락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왜 연락해야 하나? 연락할 필요 없지 않나? 안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한 부모님께 걱정 끼치고 싶지 않다. 오빠가 내 장례식장에 오는 것도 절대 사양하고 싶다. 모아둔 돈은 얼마 없지만, 탈탈 털면 외국에 갈 수 있을 거다. 가서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곳에서 죽자. 그렇게 사라지자.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실종이 차라리 더 마음 덜 아프지 않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신호가 바뀌는 순간 반짝 눈을 떴다.
잠에서 깨자마자 옆에서 배를 긁으며 자는 태준이를 깨웠다. 야, 일어나. 일어나봐. 그리고는 덜 깬 태준에게 내가 죽다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해줬다. 태준이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협탁 위에 있는 담뱃갑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꼭 건강검진 가기 전에는 별 희한한 꿈을 다 꾸더라. 그러고는 느릿느릿 베란다로 향한다.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외친다. 베란다에서 피우지 마, 저번에도 윗집에서 욕했어. 태준이 대충 손만 들어 흔들었다. 괜찮아. 저 씨발놈이. 내가 안 괜찮은데. 너 나가고 없는 시간에 윗집이 찾아와서 내게 갖은 난리를 다 떤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태준이는 들어먹지를 않는다. 윗집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볼 생각을 하니 진짜 죽고 싶다. 내가 저 새끼 때문에 죽고 싶어. 정말. 그런데도 나는 태준이를 떠나지 못하고, 태준도 나를 떠나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살게 되었다. 오래된 부부가 그렇듯, 부부도 아니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 결혼하지 말자, 서로 정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리라고 생각했는데 태준은 오래도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먼저 꺼내 본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우연인지 말이 끊기고 흐름이 끊겨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용기를 냈으니 태준도 용기를 내어 우리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해주기를 원했다. 입을 다물고 태준이 말하길 기다리는 동안 속은 속대로 상하고, 나 혼자만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려 결국 8년째 이 모양 이 꼴이다. 예나는 말했다. 그거, 결혼할 마음 없는 거야. 다른 여자 있는 거 아니야?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그렇다면 나가면 될 것을 왜 아직 내 옆에 있는지. 월세 때문인가? 하긴 태준이 혼자 나가서 보증금 걸 돈이 어디 있어. 적당히 내 곁에서 비위 맞추면서 밖으로 도는 삶을 살겠다 정한 걸지도 모르겠다.
예나는 태준이 그런 낌새를 보이면 언제든지 버리고 자기한테 연락하라고 했다. 태준보다도 더 오래 너를 봐온 소꿉친구이니, 자기가 책임지고 좋은 남자 소개해주겠다는 거다. 근데 난 남자 만나기 싫다.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태준이랑 살고 있나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예나는 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못 만나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거라고 했다. 자기는 결혼해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설거지도 분리수거도 오빠가 쉬는 날에 척척 하는데 요즘에는 그런 신랑이 얼마나 드문지 아느냐는 둥 갑자기 자기 자랑을 시작한다. 근래의 예나는 자기 신혼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내게 보고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앞에서 우울증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는 내가 꼭 쓰레기장에 버려진 산세베리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내 나름 좋은 공기 만들어보겠다고 하는데 옆에서 퍼지는 공기가 쓰레기 냄새 가득 밴 공기인 거지. 그렇다고 예나가 쓰레기라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기분이 그렇다는 거다.
꼬리가 긴 태준이 나간 문으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다. 쓰레기를 찾았다. 베란다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피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문을 닫고 어둠 속에 손을 더듬거려 공기청정기를 켰다. 암막 커튼을 쳐놓은 탓에 한낮이 되어도 우리 방은 어둡다. 언제 걷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늘 쳐놓고 살다 보니 생활 리듬이 엉망이 되었다. 자기 전에 열어두고 잘까 싶다가도 그러면 눈꺼풀이 너무 환해서 잘 수가 없다. 열어두고 지내자니 굳이 다시 칠 것을 귀찮게 그럴 필요 있나 싶어서. 해를 못 보고 지내면 사람이 더 우울해진다고 하는데. 비타민B가 중요하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하지만 종합비타민은 챙겨 먹을지언정 커튼을 걷거나 산책할 생각은 없다. 난 정말 게으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침대에 엎어져서 코를 훌쩍였다. 눈물이 나는 건 아니고, 그냥, 비염 탓이었다.
아주 잠깐만 엎어져 있다가 일어나서 병원 갈 채비를 해야지. 챙겨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자. 휴대폰, 지갑, 약 파우치, 안경, 녹음기, 보조배터리, 에어팟.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분명 충분한 것 같은데 충분한 것 같지 않다. 항상 다 됐다 싶다가도 내려가면 아 그거 가져와야 하는데, 해서 태준에게 욕을 먹었다. 넌 정말 정신머리가 없어. 내가 정신머리가 없으니까 우울증이지, 정신머리가 있으면 우울증이겠어? 그러면 또 싸우고. 휴대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메모를 쓰기 시작한다. 다시, 휴대폰, 지갑, 약 파우치, 안경, 녹음기, 보조배터리, 에어팟. 그리고 필요한 거 있으면 추가하면 돼. 이제 됐어. 난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쁘지. 겨우 이런 거 가지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예식장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던 예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미안해, 축의금을 깜빡했어. 정말 멍청하지. 네가 생각해도 나 멍청하지. 심지어 옷은 또 장례식장 가는 사람처럼 새까만 정장을 입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정장이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 소셜커머스에서 할인하는 걸 사서 위아래 사만 원 안 되는 값으로 샀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내 발보다 한 치수는 큰 구두를 신고 버스를 오르내려 도착한 예식장. 지하상가에서 산 오천 원짜리 싸구려 가방을 열고 안을 보니 따로 빼두었던 축의금 봉투가 없었다. 신발장 위에 놓고 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요즘 예식장은 하루에도 몇 커플이 바쁘게 결혼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을 연장할 수 없고 빨리빨리 빼줘야 한다고. 닭장 같은 모텔에 들어갈 때처럼, 꼭 닭대가리 새끼들처럼 결혼을, 씨발 그렇게. 평생 단 한 번뿐인 결혼을 왜 그런 식으로 하는 건데.
결국 모른 척 들어가서 손뼉 치고 음료수만 마실까 하다가 배가 고파서 떡 좀 먹고 김밥도 먹고 초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그러고 나서 신부 곁에 들러리로 사진 찍고 나서야 나 돈 없다고 미안하다고. 무전취식하고 모든 걸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내가 말했다. 예나는 자애로운 선녀처럼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돈이 중요해?
왜 안 중요하냐 물을 뻔한 걸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다. 우리 사이가 뭔지도 모르겠다. 나랑 얘랑 진짜 친한지. 친하다는 건 뭔지. 친한 게 이렇게 나를 비참하게 하는 일이었는지. 나중에 사진 나오면 보내준다는 예나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장 위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축의금이 보였다. 뭘 봐, 이 개새끼야!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렀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근데 외치고 나니까 무서운 거다. 내 말에 집에 숨어있던 사람이 화가 나서 칼을 들고 나오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를 찌르면? 나는 구두를 조심스레 벗고 돈 봉투를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암막 커튼이 쳐진 깜깜한 내 방. 눈을 감고 생각했다. 괜찮아, 돈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잖아. 돈을 잃어버렸으면, 벌지도 못하는 주제에 잃어버렸으면 진짜 샤워기에 목을 매고 죽어버렸을 테지만 아니었잖아? (하지만 난 겁이 많아 샤워기에 목을 매는 건 무리다.) 다음부터는 메모를 쓰는 거야. 메모를 쓰고 몇 번이고 확인하면 괜찮겠지. 예나도 괜찮다고 했잖아. 괜찮다고 했나? 예나가 나한테, 괜찮다고 했나? 근데 그 뷔페 음식 정말 맛있었지. 초밥 진짜 오랜만이었어. 내가 먹은 게 참치였을까? 울고 싶다. 참치 뱃살 먹고 싶어. 비싼 거 먹고 싶어. 나도 예쁜 옷 입고 친절한 사람 하고 싶어.
뭐해? 준비 안 해?
태준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햇빛 탓에 눈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내가 대답했다. 갈 거야, 말만 하고 자리에서 안 일어났다. 그러자 태준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다. 예나네 집 개처럼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예쁜 옷 입고 가야지. 하지만 옷장을 열어봐야 예쁜 옷 따위는 없을 거다. 생각만 해보는 거다, 생각만.
그러고 보니 지난달 예나의 신혼집에 갔을 때, 예나네 강아지가 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 끝자락에 레이스가 달린 체크무늬 원피스였다. 나는 예나가 내놓은 비싼 멜론을 쉴 틈 없이 집어먹으며, 비비 옷이 아주 고급스럽고 멋져 보인다고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사실 개새끼가 입은 옷 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러자 예나는 기다렸다는 듯 안고 있던 비비를 멜론을 먹는 내 앞에 아니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내밀었다. 비비의 성기가 툭 튀어나온 게 보였다. 수컷이었다. 예나는 비비의 원피스를 백화점에서 샀다고 했다.
나도 깜짝 놀랐어. 요즘은 강아지 옷도 사람 옷 파는 곳에서 팔더라니까? 내 옷 사면서, 우리 비비도 내 자식 같은 아인데 아무거나 입힐 수 없잖아. 나는 포크를 그릇에 탕! 하고 내려놓고 싶었다. 예나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아무거나 입는 내가 뭐가 돼. 쓰레기 버리러 갈 때면 헌옷수거함에 있는 옷을 뒤져보고 싶어지는 내가 뭐가 돼. 너 지금 나한테 굉장히 무례했어. 지적이고 우아한 말씨를 사용하여 지적하고 싶다. 너는 참 되먹은 인간이라고 모욕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구나. 웃으며 나는 말한다. 나에게는 아직 망상과 현실을 구분할 이지가 남아있다. 다행이면서 속이 답답하다. 차라리 모든 걸 다 놓아버릴 수만 있다면. 예나는 나중에 함께 구경하러 가자고 했다. 뭐를? 비비 옷을.
예나는 사사건건 나를 열 받게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게 분명한데, 아니 의도하지 않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짜 짜증 나게 하는데. 상담 선생님은 내가 피해망상이 심한 거라고 했다. 열등감이 심해서 모든 것을 왜곡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왜곡하지 않을 수 있나요? 열등감을 버릴 수 있나요? 그러자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내가 원해서 내 돈 주고 가는 상담이지만 매번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이다. 태준이 피우는 담배 연기처럼 영양가도 뭣도 없는, 그저 해롭기만 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기만 하고 돌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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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에게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었느냐고. 막연히 내 생각으로는 그냥 미워했겠지, 싶으면서도 따지고 싶었다. 태준이는 그게 문제라고 했다. 너는 매사 뭐든지 너무 다 따지기를 원해. 가끔은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나는 태준의 그 말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해 울며 소리 지르며 싸운다. 그럼 너였다면, 네 형제가 너를 복날에 개 패듯이 패는데 그러려니 받아들여? 요즘은 개도 그렇게 때리면 안 돼. 애초에 생명은 그렇게 때리면 안 돼. 네가 뭘 알아. 그러면 태준이는 내가 너무 비이성적이라고 한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진정해. 좀. 태준이는 죽을 때까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죽어서도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태준이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래서 태준이가 좋다. 부럽다.
나도 태준이처럼 살고 싶다. 다음 생에는 태준이처럼 몸도 정신도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서 새벽에 편의점 가서 맥주 사서 그 앞에서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더 바란다면 다음 생에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돌로도, 꽃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다.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다. 내가 의사 선생님께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은 “거봐요. 살기 싫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기 싫은 것뿐이에요.”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렇게 살지 않는 방법이 없다. 희망과 긍정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와 상처가 있다.
한때는 태준이와 함께라면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픈 건 고쳐서 아프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나도 맞다고 생각했다. 극복할 수 없는 것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내 상처는 내가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랫동안 앓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상처는 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 맥이 풀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니, 불쌍하잖아.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방법이 없다. 상처를 잘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세미나를 듣고 상담을 받고 내 나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하지만 없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서 서툰 일본어로 일본취업박람회장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다섯 군데의 면접을 보았다. 한국을 떠나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다 낙방이었다. 원래 일본 취업이라는 게 그래요, 언니. 면접에서 떨어지면 언니는 사원이 아니라 고객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끝까지 일어나서 마중해주고 면접 때 상냥하게 대해주면 그게 떨어지는 거래요, 언니. 같이 면접을 보러 다니던 선아가 말해주었다. 나는 그 후로 상냥한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모두가 다 꿍꿍이를 갖고 있다. 나 역시도 꿍꿍이를 갖고 있다. 이건 너무 당연한 거다. 사람이 어떻게 아무것도 안 바랄 수 있지? 줄 때는 받을 생각하지 말고 주라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줬으면 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안 받아도 괜찮다는 듯 웃을 수 있는 건 돈 많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다. 자기 핸드크림 안 사고 나한테 매번 빌려달라던 동기가 있었다. 매번 자기 치약 대신 내 치약을 몰래 쓰는 룸메이트가 있었다. 가끔이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그 정도는 신세 질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를 지나쳤다. 내가 쓰지도 않는 핸드크림이,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이에 내 치약이, 절반이나 줄어든 걸 보자 참을 수 없었다. 야. 네 거 사서 써. 참다 참다 말했더니 그간 빌려 간 건 생각도 안 하고 넌 참 치사하다며 사람을 좀생이로 만들었다. 지독한 인간들이었다. 그들과 연락을 끊었다. 오래 사귀어봐야 내게는 득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잘했어. 나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근데 지금 와서 연락처를 보니 연락할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함께 면접 보러 다니던 동생, 선아도 지금은 연락이 끊겼다. 선아는 일본에서 잘 지내고 있겠지. 원어민처럼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애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가 들러리가 된 것처럼 기가 죽었다. 다음 해에도 기회는 있으니 도전해보라고 선아는 말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토익 800점대의 일본어 발음 나쁜 한국인은, 일본에 갈 수가 없다, 선아야. 물론 여행으로라면 갈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마지막 회사에서 탈락 메일을 받았을 때 사는 동안 일본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많은 갈등을 빚어왔고, 지금도 이어져 있고, 나는 용서할 수 없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졌다.
내가 자포자기가 빠른 성격인 걸까. 우물을 팔 때 한 번만 더 파면 물이 나오는데 그걸 모르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한 우물만 끝까지 파라던 한국사 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근데 한 우물 파는 것도, 그렇게 깊게 내려가는 것도 밖에서 먹을 것 갖다주고 마실 것 갖다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나처럼 아무도 없는 사람은 혼자 눈물 흘려서 그걸 마시면서 살아야 하나. 더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나왔더니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한다. 어휴, 저 한심한 년.
그리고 그 한심한 년 옆에 있는 한심한 놈. 태준이는 물류센터를 다닌다. 물류센터는 늘 손이 부족한 곳이라서 태준이가 언제 가든 반겨준다. 몸은 좀 힘들어도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있어서 좋다고 태준이는 말했다. 어떻게 그래? 배송 메시지도 읽어야 하고 문자도 보내야 하고 문 앞에 놔둬달라고 하면 그게 분실되지는 않을까 뒤돌아서서 나오면서 겁나지도 않아? 배송 메시지야 거기서 거기고, 문자 보내는 거야 확인한다 치면 귀찮지 않고, 분실은 도둑놈이 나쁜 거니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어쩌면 이 점이 태준이를 위대한 놈으로도 한심한 놈으로도 만든다 생각했다. 태준은 본인이 기계라고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인간임에도 이런 삶을 사는 게 괴로운데, 태준은 다르다. 태준은 이러쿵저러쿵 해도 어쩄든 살아야 하는데 너무 많은 걸 생각하면 좋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아버지가 지방으로 가게 된 건 오빠 탓도 컸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그 폭력성의 싹이 남달랐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랬다. 부모님이 보시지 않을 때는 도박이라도 하듯 내 뺨을 철썩 때리고 모른 척하기도 했다. 내가 울면서 오빠가 때렸다고 해도 부모님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건지 모른 척한 건지 뻔한 일이긴 한데,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단 그렇게 외면해보려고 한다. 진짜 지독하게 외로웠다. 내가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발을 밟거나 뒤통수를 치고 가는 일도 빈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빠가 내게 가위를 주며 말했다. 야, 잘라. 나는 가위를 받아들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뭘? 뭐긴 뭐야. 네 머리카락. 자르라고. 중학생 때였다. 나는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의 길고 아름다운 생머리를 동경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한창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머리를 자르는 건 쉬운데, 기르는 건 그렇게 지겨울 수가 없었다. 매일 몇 센치씩 자란다고 차라리 알려주면 모를까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봐도 내 머리는 길어지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어깨선을 넘겨 길렀는데 자르라니. 나는 가위를 꼭 쥐고 대답했다. 싫어. 처음으로 해본 반항이었다. 오빠가 웃었다. 곧장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 몇 대를 더 맞았는지 모르겠다. 시야는 번쩍거리고 머리가 흔들리는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가위는 꼭 쥐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위를 쥐고 있는 건 나였는데 왜 나는 고작 말로만 싫다고 한 걸까. 차라리 그때 죽여버릴걸. 시간을 돌린다면 그때로 돌아가서 강민식을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내 배를 발로 차고,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내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던 그 쓰레기 새끼를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까 하는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는 아버지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갔다. 안 된다는 엄마를 설득하며 아버지는 이 근방에서는 오빠를 받아줄 학교가 없을 거라고 했다.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없었다고, 슬퍼도 참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오빠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내가 죽어도 저렇게 울까 궁금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태준에게 했을 때, 태준이는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남자주인공처럼 느끼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 죽으면 너네 엄마보다 더 서럽게 울게. 그 말을 듣는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 새끼는 지금 내가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건가? 애초에 태준이 하는 말 외에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입을 열 때마다 깬다. 찬장에 있는 그릇을 다 집어 던지고 싶다. 깨진 유리 조각으로 태준이를 찔러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 했다. 왜? 쓰러져서 피를 흘리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태준에게 차갑게 말하는 거다. 나에게 필요한 건 눈물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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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실은 내 방 같았다. 캄캄하고, 켜놓은 모니터에서 푸른 빛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간이용 침대에 누워서 내 앞의 모니터를 보았다. 누구의 것인지, 또 어느 부위인지 알지도 못하는 사진이 보였다. 올해 초에 검사했을 때 담낭에 용종이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오늘 꾼 꿈도 그렇고, 혹시 이게 정말 암은 아닐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워 있는데, 의사가 들어왔다. 걷어 올린 배 위에 차가운 젤을 올리고, 초음파 기기로 꾹 누른다. 마사지도 받아본 적 없는데 낯선 사람 앞에서 배 까고 누워서 있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모니터에 까만 바다 같은 게 떴다. 바다가 아니라 내 가죽 내부인데, 꼭 바다처럼 보였다. 멀리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멀지 않아도 바다처럼 보였다. 블랙홀이나 우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용종이 있을까? 악성일까? 암이면 보험금을 받겠지. 그래, 차라리 암이면 좋겠다. 모아두었던 돈도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암에 걸리면 보험금을 받겠지. 작은 암이면 홀랑 떼어버리면 되니까 나쁘지 않다. 수지맞는 장사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꿈에서는 그렇게 울었는데. 누구에게 연락할지 몰라서 혼자 훌쩍거렸는데.
지니가 만약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준다면? 따위의 간단하고 허접한 질문조차도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내가 단시간에 낼 수 있는 답이 아니다. 아주 오래 생각하더라도 답을 내지 못할 것이다. 꿀럭, 꿀럭. 검사한다고 아무것도 먹고 오지 않은 바람에 속에서 자꾸 소리가 났다. 창피해서 참아보려고 했지만, 내 장기가 내는 소리를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다. 숨을 참으면 되는 건가? 하지만 난 숨을 정말 못 참고, 숨을 못 참으면 들켜서 오빠한테 머리끄덩이를 잡히고, 그때 머리를 처음으로 자르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하지만 자르지 않았고. 참을 수 없다면 살아야 하고 자르지 않는다면 머리끄덩이를 잡혀야 한다.
새까만 바다가 먼 행성의 표면을 찍은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예나가 말했다. 강아지가 죽으면 강아지별로 가고, 고양이는 죽으면 고양이별로 간다고. 무지개다리를 건너서 간 그곳에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좋아하는 먹을 것들로 넘쳐나고 형형색색의 옷과 장난감이 가득하다고 했다. 또 언제든 원하면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피곤하면 최고급 도넛 방석에 누워 잘 수 있다. 마음껏 소파를 물어뜯고 양말 한 짝을 숨길 수 있다. 누가 들어도 그냥 하는 말이었는데 나는 혹해서 물었다. 그럼 인간은?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 인간 따위 알 게 뭐야. 예나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불공평하다. 나는 적자가 아니다. 인간이 모두 적자라는 건 낭설이다. 나도 죽어서 갈 수 있는 행성이 필요하다.
제발, 정말 간절하게. 무언가 튀어나온 것이 있기를 바랐다. 검사하는 선생의 입에서 탄식이 터지기를 바랬다. 당장 악성이고 말기여서 치료할 수 없고 안타깝지만 지금 누우신 이 검사실의 허접한 간이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셔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듣고 싶다. 유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내 고통을 모른 척한 부모님과 악마도 울고 갈 사이코패스 강민식 때문에 이 암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평생 고통 속에 살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죽기 직전에 그냥 전하지 마세요. 하고 싶다. 죽어서는 유령이 되어 내 장례식장에 가고 싶다. 엄마가 우는지, 아버지가 우는지, 오빠는 결국 장례식장에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따위의 것을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확인하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겠지? 축의금 봉투를 두둑이 들고 온, 아니 장례식장은 조의금이지. 그런데 예나는 축의금 봉투를 들고 올 것 같다. 그래, 예나는 나를 잘 아니까. 세상에서 사는 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내 기분을 자주 뭣 같이 만드는 친구였지만 그래도 예나는 아니까 축의금을 낼 거다. 국화 한 송이를 놓고 향을 피우고 축하해! 라고 외칠 거다. 장례식 순서가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예나의 결혼식을 제외하면 어디에 초대받은 기억이 없다. 그게 슬픈 일이든 슬프지 않은 일이든. 어쨌든 죽으면 이건 내 일이 아니니 그들이 알아 하겠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거라곤 육개장 먹는다는 것뿐이다.
내가 먹었던 가장 맛있는 육개장은 오빠 친구 장례식장에서 먹은 육개장이다. 어른들은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았다. 나는 구석에 가서 앉아 사이다를 마셨다. 식사를 나르던 이모가 육개장 하나를 내 앞에 두었다. 슬퍼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리가 났다. 후루룩, 국물을 떠먹고 돌아보니 상주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나도 과연 당황해서 사레들렸다. 사이다를 마시니 따끔따끔하니 가라앉았다. 당신이 자식 교육만 똑바로 했어도! 이번에도 사레들릴 뻔했다. 깔깔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육개장에 고사리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고기도 몇 점 안 들었는데 맛있는 육개장은 또 처음이었다. 국물은 잘 먹지 않는 나인데, 그날은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사이다까지 다 마시는 바람에 오줌이 마려웠다. 여전히 상주와 실랑이하고 있는 아버지를 모른 척 지나쳐 화장실로 갔다. 검은 정장, 깨끗하게 올려묶은 머리. 여기서는 모두가 그런 차림을 하고 있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바로 알아봤다. 장례식장에 간다고 양말까지 검은 걸 신어놓고 가방은 형광 등산용 가방을 맨 사람은 우리 엄마밖에 없다.
엄마. 여기서 뭐 해? 내 목소리에 엄마가 깜짝 놀라며 무언가를 툭 쳤다. 고추기름이 잔뜩 낀, 텅 빈 육개장 그릇이었다. 놀랐잖아. 엄마가 신경질을 냈다. 뭐하냐고. 다가가서 보니 엄마는 몰래 챙겨온 밀폐 용기에 육개장을 옮겨 담았다. 어이가 없었다. 민식이는 차에서 기다리잖아. 배고플 거 아니야. 엄마가 밀폐 용기를 넘기며 가방에 좀 넣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걸 받아서. 받아서 어떻게 했더라. 그래, 엎었다. 바닥에 던졌다.
깨끗하네요.
의사가 말했다. 옆에 휴지 있으니까 그걸로 닦고, 정리하고 나오세요. 정말요?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꼼꼼하게 확인해보았는데 깨끗해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가 나가고 휴지로 배를 닦아내고 멍청히 앉아 잠시 바다라 생각했던 내 담낭을 보았다. 검사실 밖으로 나오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던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어땠어?
꼭 기대하는 사람 같다. 나는 퉁명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준이 다시 물었다. 없어? 어. 없어. 누가 보면 산부인과에 온 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건강하대? 어땠어? 보통 이 나이대의 남녀가 병원에 함께 오면 대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예나는 산부인과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엽산도 꾸준히 챙겨 먹고, 생리 주기도 체크하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자기 아이가 생기면 내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네가 대모가 되어주는 거지. 대모라는 말도 그때 처음 들어봤다. 대부라는 말은 좀 들어봤어도, 비슷한 말이겠거니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그렇다고 예나에게 아이가 생겼을 때 살갑게 굴 자신은 없다. 이 말은 해줄 수 있다. 너희 아빠가 너 때리면 우리 집으로 와. 하지만 예나 말에 따르면 예나네 ‘오빠’는 신사 중의 신사라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어디든 이름만 올리네. 호적에도 이름만 올리고, 예나의 족보에도 대모로 이름만 올린다. 실체가 없다, 실체가. 실속도 없고.
원무과에서 수납을 마친 뒤 병원 건물 일 층에 있는 칼국수 집에 왔다. 나는 매생이 칼국수, 태준이는 바지락 칼국수를 주문했다. 태준이는 매생이를 먹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뜨겁고 미끌미끌하고 이상하게 생겼는데 그런 걸 왜 먹느냐고 했다. 내가 뭘 먹든 네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내 뱃속까지 들여다보고 온 마당에 그럴 기운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태준이는 내가 매생이를 좋아한다고 십 년째 꾸준히 말하는데도 꾸준히 이해하지 않는다.
나는 매생이가 좋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에 오래된 매생이굴국밥집이 있다. 엄마랑 둘이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면 항상 그곳에 들려서 매생이굴국밥을 먹었다. 질릴 법도 한데 질리지 않았다. 엄마는 그 뜨거운 걸 그렇게 급하게 먹느냐며 찬물을 챙겨주었다. 나는 혀 천장이 다 데여서 아파도 그걸 좋다고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고 잠들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오늘 용종이 발견되면 아예 떼고 오려고 단단히 준비까지 하고 온 참이었다. 당연히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니. 속이 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건강하니 잘된 거 아닌가 싶다가도, 돈도 없는데 조금만 아프지 그랬나. 분명 병들었는데 이상한 데서 건강한 내가 싫었다. 칼국수를 먹으면서 매생이 때문에 여러 번 혀를 데었다. 이렇게나 많이 데였는데도 내 혀천장은 왜 이렇게 약할까. 엄마가 그랬다. 마음에 안 드는 사위에게는 일부러 매생잇국을 끓여줬다고 했다. 매생이는 열이 잘 식지 않아서 아무리 식혀 먹어도 혀를 잘 데이니까, 얄미운 사위 놈 혀 데이라고 장인어른 댁에 가면 그렇게 끓여준다는 거다.
태준아.
어?
나 죽으면 육개장에 매생이 넣어주라.
뭐? 싫어.
얘는 진짜 맥락을 읽을 줄 모르는 건가? 죽으면, 이라는 심각한 말이 들어갔는데. 곧 죽을 사람 소원은 다 들어준다는데 뭐가 문제지? 내가 진짜 미친놈이랑 살고 있구나. 안 그래도 열 받을 대로 받은 혀 천장이 쓰라리고 아픈데 미친 새끼, 진짜 미친 새끼.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고 있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태준이는 급하게 먹던 것을 삼키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니, 내 말은.
육개장에 매생이를 넣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내 장례식장에 기호성도 생각해야 해?
너는 죽고 없잖아.
내가 살아서 나를 위해 하는 행사가 그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목소리가 커지자 여기저기서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준이 손을 들었다. 나는 움찔했고, 태준이는 방황하던 손을 내리고 한숨을 한 번 푹 내쉬고 말했다. 언제나 하는 말.
일단 진정 좀 해.
필요 없어.
야.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몇 숟갈 먹지도 못했는데 입맛이 다 떨어졌다. 개새끼, 진짜 개새끼.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나는 틀린 말을 한 게 없다. 나는 이 한심한 놈과 결혼하지 못할 거다. 그렇다고 헤어져서 다른 멋진 놈과 만나서 결혼하는 기적 따위는 바랄 수도 없다. 나는 한심하니까. 그렇다고 예나네 강아지가 될 수도 없다. 예쁜 옷을 입을 수도, 무지개다리로 가는 티켓을 받을 수 없다. 길고양이도 될 수 없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끝에라도 무지개다리를 건너 행복해질 수도 없다. 그나마 죽어서 치르는 장례식이 내 가장 큰 행사일 텐데. 근데 그깟 매생이 하나 못 넣어? 내가 대접 좀 하겠다는데? 왜 못하는데. 왜 죽어서도 남 눈치를 봐야 하는 건데. 매생이가 얼만데. 내 보증금으로 하면 되잖아. 너 나가. 내 집에서, 그러니까 내가 빌린 남의 집에서 나가.
태준이는 다시 먹고 있다. 내가 조용하니까 자신의 카운슬링이 먹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재수 없는 새끼. 내가 흘겨보자 태준이는 눈살을 찌푸렸다가도 금세 웃는다. 내가 봐줘야지, 하는 얼굴이다.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태준이 자기가 먹던 수저를 내 그릇에 담근다. 어때? 맛있어? 방금까지 매생이 가지고 난리를 쳤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나만 진짜 미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제 진짜 저 매생이칼국수는 먹을 수 없다.
태준이 국물을 떠서 입에 넣는다. 나는 매생이를 모르고 입에 넣은 태준이 볼썽사납게 앗 뜨거! 외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태준이는 묵묵히 우물거리더니 진짜 뜨겁다, 한마디 덧붙이고 말았을 뿐이다. 그 꼴을 보니 애초에 장례식도 너무 큰 꿈이었던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배고프다. 먹던 걸 뺏겼다고 생각하니 더 분통이 났다. 태준이는 운전하는 내내 내게 말을 걸었다. 집에 갈 때 뭐 사갈까? 먹고 싶은 거 없어? 남들이 보면 태준이가 나를 참 배려한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태준이는 자기가 편하려고 그러는 거다. 나랑 어색하게 있는 게 싫고, 내가 자신에게 불퉁하게 대하는 걸 잠시라도 참을 수 없는 스크루지 같은 인간이다. 태준과 이야기하기 싫어서 짧게 대답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하지만 늦잠까지 퍼질러 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고픈 탓에 잠은 오지 않았다.
육개장이 먹고 싶다.
눈을 감으면 나는 다시 장례식장, 엄마와 마주친 화장실로 돌아간다. 엄마가 말한다. 이것 좀 가방에 넣어줘. 투명한 밀폐 용기를 내게 넘긴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면서. 교복을 입은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밀폐 용기를 받아 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숟가락을 꺼낸다. 화장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철퍼덕 앉는다. 너 뭐 하는 거야? 엄마가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밀폐 용기를 열고 육개장을 먹기 시작한다.
얘가 왜 이래, 너 미쳤어?
엄마가 숟가락을 든 내 팔을 잡아당기고, 하얀 교복 와이셔츠에 빨간 국물이 튀었다. 아, 이거 놔. 내가 신경질적으로 팔을 쳐낸다. 가서 밥이나 가져와. 고사리가 꼬들꼬들하니 맛있다. 역시 이만한 맛집이 없다. 나 죽으면 이 장례식장 예약해야겠다. 여기에 매생이를 추가하면 얼마나 맛있을까. 뜨거운 걸 먹으니 자꾸 콧물이 났다. 나는 개처럼 킁킁거리면서 먹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아무도 없다. 다 식은 육개장이 담긴 밀폐 용기와 숟가락을 든 나만 어딘가에 서 있다. 무언가 울렁거리는 듯한 검은 곳 위에 서 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쯤 걸어가면 볼록 튀어나온 게 하나 있을 것 같았다. 걸었다. 한참 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끝도 없는 평지 위에 나 혼자 서 있다.
이 소설은 우울이 극에 달했을 때 쓴 글입니다. 오랫동안 키우던 강아지가 죽고 본가로 돌아와 후루룩 쓴 직후에 친구에게 보여주니 친구가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지지야. 넌 뭐라도 해낼 거야." 이 친구의 호평 한마디도 역시 훗날 제가 대학원에 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날 꿈을 꿨었습니다. 그 꿈에서 저는 암에 걸렸고, 곧 죽을 거란 말을 들었지만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저 아무도 걱정하지 않게 차라리 혼자 실종되는 그림을 상상하며 꿈속에서 오래오래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의 단편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합니다. 여러 모로 저의 실제 경험들을 많이 담았지만 그만큼 허구도 많습니다.
이런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앞서 제 소설을 읽고 호평해준 친구가 "근데 이 소설 속 예나가 나는 아니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엄마랑 같이 백화점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본 브랜드숍의 강아지옷을 보고 깔깔거린 기억을 바탕으로, 해맑고 구김살 없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예나를 재구성하였을 뿐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몹시 놀라며 아니라고 해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소설 이야기를 어디서 많이 한 적이 없으니 글이 길어지네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장례식장이야말로 비혼주의인 저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행사가 되지 않을까, 하고 저는 늘 생각합니다. 때문에 주인공도 장례식에 매생이를 넣고 싶어하는데 모든 것이 참. 불통하네요. 그렇지만 제목은 <낙관>입니다.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