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

by 지지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장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온화한 하늘이었다. 장은 뒤이어 번쩍일 것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바깥을 응시했다. 그러나 장이 예상한 것처럼 하늘이 빛으로 가득 차는 일은 없었다. 장은 고개를 돌려 다시 읽던 책을 보았다. 아까의 천둥소리 때문이었을까.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장은 앞장을 넘겨보며 기억을 되짚으려 했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책의 이름조차도. 책을 덮고 표지를 보았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당황한 장이 책을 이리저리 살피고, 다시 책을 펼쳤을 때는 내용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장은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인터폰 화면에는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누구세요. 장이 말하자 초인종을 누른 이가 카메라 가까이 다가왔다. 화면에는 이제 그의 얼굴이 가득하게 차 있었다. 작은 카메라 렌즈에 금방이라도 얼굴을 밀어넣을 듯 코앞으로 다가온 기름기로 번지르르한 이마와 흰자위가 기묘해서 장은 뒤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장민주 씨 맞으시죠. 문 좀 열어주세요. 모르는 이의 입술에서 나오는 제 이름에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설마하니 보이스피싱인 걸까? 장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다시 힘주어 물었다.


누구시냐고요.


여차하면 신고할 생각으로 미리 설치해뒀던 긴급 어플을 켜놓고 남자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대답 대신 카메라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품에서 무언가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오래된 인터폰인지라 카메라 화질이 좋지 않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장은 집을 볼 때 인터폰을 제대로 눈 여겨 보지 않은 걸 후회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른 화면을 한참 쳐다본 끝에 읽은 명함 위 글자는 ‘국가정보원’이었다. 국가정보원? 그게 뭐지? 간첩이라든지, 외국 스파이를 잡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국가정보원이 왜? 살면서 장은 단 한 번도 의도적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 한 적이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최대한 희미하게 있는 것이 장의 목표라면 목표였다. 만약 장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다면 십 년 전 운전미숙으로 가벼운 접촉사고를 일으킨 게 전부였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사람도, 차체의 손상도 적어 보험사의 중재로 원만하게 해결했었다. 아닌가.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믿었던 건 자신뿐이던가. 그렇다고 이렇게 십 년만에 갑자기 나타나서 이렇게…… 아니면, 요즘은 보이스피싱도 이런 식으로 하나? 보이스피싱은 전화로만 하는 줄 알았는데. 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리는 사이비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국가정보원 흉내를 내며 찾아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마 내 개인정보가 유출된 걸까. 어디까지 유출된 걸까. 스팸전화가 많이 오는 걸 보면 전화번호가 유출된 건 틀림 없는 것 같고, 오늘 이렇게 자신의 이름과 집까지 정확히 찾아왔다면…… 이름과 주소가 함께 유출되었나. 도대체 어디에서? 일전에 한 번 잠깐 만났던 그 남자?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장은 점점 불안해졌다. 만약 정말 국가정보원이라면,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 장이 물었다.


그렇다면 공문을 먼저 보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인터폰 너머의 그가 깔깔 웃었다. 그 자신도 결례인 걸 아는지 웃음을 참으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이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을 때 그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말했다.


장민주 씨.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필요하시다면 공문을 보내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이건 장민주 씨의 생사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 장이 그토록 기다리던 천둥이 내리쳤다. 장은 너무 깜짝 놀라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엉망으로 놓은 운동화를 밟고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생사와 직결된 문제라니. 누군지는 몰라도 장난치러 온 게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의 기억 속에는 최근 생사에 직결될 만한 사건이 없다. 편의점 손님들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청테이프나 가위를 사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야. 신고를 할까? 장은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신고를 했다가 보복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부터 없는 척할 걸 그랬다. 장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대답하지 않고 화면을 꺼버렸다. 그 시간 동안에도 그는 장을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장은 물러서서 인터폰을 노려보았다. 그가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화면이 밝아질까 불안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덮은 책을 다시 펼쳤다가 문득 내용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장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나서서 장을 소외시키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어도 장은 양철로봇처럼 자꾸만 어딘가가 삐걱거렸다. 가장 어색한 건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장의 안부를 물었다. 오늘 아침 밥은 뭘 먹었어? 어제 만화 봤니? 재밌었니? 집에 가서는 뭘 했니? 넌 뭘 하고 싶어? 우리 뭘 하고 놀까. 그때마다 장은 어딘가 콱 막힌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크고 나서 그것이 빚진 느낌이란 것을 알았다. 말을 빚졌다. 그래서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장은 아이들이 궁금하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아이들이 하는 말만 따라 했다.


아이들이 장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선생님이 부모님을 교무실로 불러 상담을 진행했다.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이 그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장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장은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피하고 말 걸지 않는 게 아니라, 장이 그들과 이야기하지 않고 책에 빠져드는 걸 선택했다는 생각.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이었다.


장은 책벌레라는 별명이 붙었다. 장은 그 별명처럼 장은 쉬는 시간이면 늘 책을 읽었다. 점심시간에는 도서관에 가서 자연과학 코너에 몰래 숨어 책을 읽었다. 발견되면 누군가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정말 책벌레처럼.


장의 독서를 향한 열정은 수업시간까지 번졌다. 장은 책상 아래로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 무엇이 장을 책에 집착하게 했는지 장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빌린 책이 다 흥미롭고 재밌던 것은 아니었다. 재밌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직 어린 장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장은 끝까지 책을 읽었다. 자신이 그 책을 덮는 순간 아무도 그 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장은 그게 가장 두려웠다.


분명 도서관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책. 전산에도 등록되어 있고, 매번 책 정리를 다시 할 때마다 한 번씩 표지를 흘끗 보고 지나가는 책이지만 아무도 내용은 모른다.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 줄도 모르면서. 어쩌면 그 책 안에는 괴물이 사는 걸지도 모르는데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혹은 학교 안으로 침입한 악당들이 책을 통해 쪽지를 주고받을지도 모른다. 장은 책임감으로 책을 읽었다. 모두가 잠든 밤 혼자 보초를 서는 눈이 형형한 군인처럼, 장은 책들을 매섭게 해치웠다.


상을 주는 시기가 되면 장은 다독상을 받았다. 자 모두, 박수. 선생님이 말하면 아이들은 일제히 손뼉을 쳤다. 교실 재활용 상자에 처박힌 독서신문에도 장의 이름이 실렸다. 쓸쓸하진 않았다. 버려진 건 자신이 아니라 그저 종이였을 뿐이니까.


장은 상상하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장은 진공 상태의 우주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연결된 책을 꽉 쥐고 그 안의 이야기를 전달받는다. 현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로 충분했다. 어차피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고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다. 아마 이런 장의 상상에는 부모님의 말씀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장이 다독상을 타오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은 장이 크게 될 아이라고 생각해 아들에게 지구본을 사주었다. 넓게 보고 생각하렴. 세상은 넓으니까. 지구본을 돌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빙글빙글 도는 지구본의 표면이 어지럽게 보였다. 그의 부모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장은 독립하면서 그 지구본도 함께 가지고 나왔다. 부모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지구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볼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지구본을 갖고 나왔다. 그 지구본은 장의 원룸 한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서 있었다. 좁은 원룸에서 지구본의 존재감은 위압적이었다. 빨래를 널 때마다 툭툭 부딪혀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장은 지구본을 버릴 수 없었다.


장은 편의점에서 일했다. 서른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아르바이트하는 딸을 부모님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학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들이 소위 말하는 스펙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도 아니었다. 취업 때마다 장은 인터뷰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번번이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적어도 그게 장이 생각하는 이유였다.


장민주 씨,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장민주 씨는 우리 회사에 지원한 동기가 무엇인가요?

장민주 씨는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장민주 씨, 5년 후의 장민주 씨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장민주 씨, 우리 회사는 협동 작업을 중요시하는데 가능한가요?

장민주 씨, 동료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할 건가요?


스피치 학원도 다니고, 동영상 강의를 보며 말하는 연습을 하며 어떻게든 고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 장은 말을 포기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부모님은 밑으로 있는 남동생의 학비를 대는 것도 빠듯하다며 장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대출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장은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회사는 장을 받아주지 않는다. 장은 모든 걸 비우고, 아르바이트를 찾아 지원했다. 이력서를 넣으면서도 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편의점은 그를 받아주었다.


집이랑 여기랑 거리는 어때요, 가까워요?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지각은 절대 하면 안 돼요. 아시죠?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은 면접이 끝나고 장은 그날 저녁 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시면 돼요. 장은 처음 점장이 말했던 대로 지각하는 일 없이 성실하게 일했다. 2년을 일했다.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길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를 정직원 혹은 점장 딸로 알았다. 그들의 상식 속에서 그 나이에 취직 대신 아르바이트를 선택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은 외따로 사는 사람이었으므로, 남들이 착각하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


물론 위기는 있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장은 주간 시간대였으나, 주간 시간대를 원하는 진짜 점장 아들이 나타나면서 해고 위기에 놓였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야간에 놓기는 조금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담담하게 해고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까지 무언가 해낼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아르바이트가 그런 것이다.


점장은 오래 일한 장을 해고하는 게 영 부담스러웠던 건지, 아니면 새로운 사람이 구해지지 않았던 것인지. 어영부영 장이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장은 무슨 일이 생기면 신고하는 버튼이 있으니 누르라고 했다. 간혹 가다가 손찌검을 하려는 듯 손을 높게 올리는 노인이나, 바닥에 침을 찍찍 뱉으며 위협적으로 구는 청년이 있었으나 CCTV처럼 공허한 눈의 장과 오래 마주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제각기의 모습으로 자신이 봐준다며 자리를 털고 나갔다.


심야의 편의점은 주간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편의점 내부는 낮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달라졌다. 찾아오는 사람도 달랐고, 그들이 원하는 것도 달랐다. 낮 손님은 학생들이 많았다. 급식이 맛이 없다며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컵라면이나 주먹밥을 사서 그 자리에서 호들갑스럽게 먹고 갔다. 무뚝뚝한 장의 태도를 싹수 없다고 헐뜯다가 일부러 주먹밥을 바닥에 던지고 모른 척 신발로 밟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장은 그 장면을 가만히 거울을 통해 바라보다가 아이가 밟고 간 주먹밥을 긁어서 버리고, 대걸레질했다. 밤손님은 주로 술을 찾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서는 비틀거리며 들어와 술을 사가고, 좀 멀쩡한 정신이다 싶은 손님은 담배를 찾았다. 낮에는 누가 사가나 싶던 콘돔도 한 명 두 명 집어가 마감 때는 다시 채워야 했다. 내가 안 쓴다고 남들 안 쓰는 게 아니네. 딱딱한 통나무 같던 장이 웃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조용한 새벽시간에 장은 홀로 남겨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다른 유희거리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기묘한 가게 있는 상상이었다. 이곳이 사실 편의점이 아니라 마음이 텅 빈 사람들을 위한 가게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 주변 가게들이 간판을 껐어도 24시간 편의점만큼은 환하게 불을 켜두고 있다. 그 불빛에 이끌려서 오는, 불나방 같은 손님들. 차라리 정말 몸이 타버린다면 좋았을 텐데. 장은 생각했다. 다만 모두가 뜨뜻미지근하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딘가 엉성한 자세로, 술에 취해, 담배 연기에 흐려져서 하나둘씩……


책을 읽는 셈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 주인공은 장민주. 나이는 서른둘, 한국에 사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 평균으로 살았으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그가 받는 상처나 슬픔, 기쁨 따위의 감정이 하릴없이 멀게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 감정. 상처를 받으면 아 그랬구나, 슬프면 슬펐구나, 기쁘면 기뻤구나. 이게 그가 오랜 독서로 얻은 삶의 지혜였다.


자신을 국가정보원이라 칭하는 기묘한 손님이 다녀간 날도 장은 출근했다. 전 시간대 근무자와 교대한 뒤 계산대에 선 장은 재고조사표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재고를 세었다. 전 근무자가 확인한 것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음료 진열대의 맨 아래 칸을 확인하기 위해 장은 허리를 숙였다. 가장 구석에 음료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애를 먹다가 겨우 세었다. 여덟 개. 숫자를 잊지 않으려 곱씹으며 허리를 세운 장은 들고 있던 재고조사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적은 숫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등골이 싸늘했다. 장은 침착하게 우선 기억하고 있는 숫자 팔을 적으려고 했다. 뒤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습관적으로 인사 먼저 한 장은 잰걸음으로 계산대로 돌아갔다. 재고조사표는 구석에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장민주 씨.


낮에 보았던 그 남자였다. 장은 계산대 아래의 긴급호출 버튼에 손을 올리고는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국가정보원에서 나왔습니다. 장민주 씨, 사안이 급해요. 제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딱딱하고 기묘한 말투였다. 책에서나 나올 법한 말투. 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쫓아와 일을 방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나는 지금 장민주 씨를 구하러 온 겁니다.


미친 사람인 걸까, 장은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하기엔 말을 또박또박 잘하고 장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장은 다른 손님들처럼 평이하게 그를 대하려 노력했다. 동요한 손은 몰래 긴급호출 버튼에 이미 가 있었지만, 그를 느릿하게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뭘 어떻게 구하겠다는 건데요. 아뿔싸. 실수했다. 나가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말을 주워담을 새도 없이 그가 기다렸다는 듯 장에게 갑자기 한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단발머리 여성이 국화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이 사람을 기억하시나요?


모르는데요. 장은 일단 대답하고 사진을 한 번 더 유심히 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장의 대답을 듣고도 그는 사진을 치우지 않았다. 다른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장은 아, 작게 탄식했다.




김유리. 여자의 이름은 김유리였다.


반에 꼭 한 명씩 있다는 ‘조폭마누라’였다. 달리기를 좋아하고, 점심시간에는 남자애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다. 처음에 남자애들은 그를 끼워주지 않으려 했다. 너는 여자애잖아. 너는 가서 쟤들이랑 공기놀이해. 그 말을 들은 그는 얼굴이 붉어져 무슨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등 돌려 가버렸다.


유리가 남자애들과 어울려 놀 수 있게 된 건, 축구하는 아이들 중심에 있던 민찬의 축구공이 망가지면서였다. 누가 칼로 찢어버린 것이다. 엉망이 된 축구공을 안고 민찬이 엉엉 울면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별 대수도 아닌 일로 사내가 우는 게 아니라면서 오히려 민찬을 혼냈다. 그날 후로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지 않았다. 축구공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다들 축구공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축구공이 망가지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축구하자며 축구공을 들고 온 건 유리였다.


모두 축구가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공의 주인을 빼놓고 축구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애들은 유리를 축구하는 무리에 끼워주었다. 아이들은 유리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했다. 유리가 아무리 머리를 길렀어도, 그 머리를 예쁘게 묶고 와도, 심지어는 치마를 입었어도 여자 흉내를 내는 남자라고 했다. 유리는 축구를 좋아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유리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루는 유리가 예쁜 반창고를 가져온 날이 있었다. 축구한다고 넘어져 자주 다치는 유리를 위해 엄마가 사다 준 거라고 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살구색 반창고가 아니라 캐릭터 반창고였다. 보기 드물게 여자애들이 유리를 둘러싸고 반창고를 하나씩 구경했다. 분홍색으로 된 반창고 위에 당시 유행하던 곰 인형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유리야, 하나만 주면 안 돼? 아이들이 물었다. 그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엄마가 어디 다쳤을 때만 쓰라고 하셨어.


장도 유리가 가져온 반창고가 뭔지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장은 유리가 무서웠다. 유리와 직접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장은 보았다. 점심시간, 책을 빌려 돌아가는 길. 학교 뒤 주차장 구석에서 유리가 커터칼로 민찬의 축구공을 찢고 있었다. 단단해서 잘 찢기지 않는 축구공에 몇 번이고 칼을 찌르는 유리의 모습은 무서웠다. 장은 눈이 마주칠세라 얼른 교실로 돌아왔다. 장의 뒷모습을 유리가 봤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장은 이 일로 악몽을 꿨었다. 짝꿍이 된 날은 기겁했다. 막상 짝꿍이 되어서는 얘기할 일이 없었다. 장은 내내 책을 읽었고, 유리는 쉬는 시간이면 어디론가 뛰어나가 놀다 들어와 수업시간에는 잠을 잤다. 장의 생각과 달리 유리와의 짝꿍 생활은 다른 어떤 아이들보다도 편안했다. 유리와 대화만 하지 않는다면 일 년 내내 유리와 짝꿍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리와 대화를 나누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일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장은 책을 읽고 있었고, 유리는 엎드려 있었다. 장은 그날 읽었던 책의 제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포레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다. 읽고 있던 구절 역시 선명하다. 페이지의 맨 마지막 구절을 읽고 있었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


장은 문장을 이어 읽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아야. 종이 결에 손이 베인 장이 작게 신음했다. 혹시 주변에 들렸을까 눈치를 보며 책을 덮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베인 손가락은 오른손 검지였다. 장은 왼손으로 검지를 감싸고 살펴보았다. 피가 나지 않았다. 분명 베였는데. 얕게 베여서 피가 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파서 검지를 감싼 손을 차마 뗄 수 없었다.


다쳤어?


자는 줄 알았던 유리가 물었다. 장은 몰래 뭔가를 하다 들킨 사람처럼 놀라 어깨를 떨었다. 유리는 담담한 얼굴로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반창고 케이스를 꺼냈다. 손가락 줘봐. 유리가 말했다. 장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싫다고 하면 유리가 화를 낼까 조마조마했다. 유리는 장의 검지를 잡고 상처를 보았다. 피가 나지 않았다. 어딜 봐도 별거 아닌 상처 같아서 장은 민망했다. 유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장의 검지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됐다. 그 말과 동시에 유리는 장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리가 다시 엎드릴 때까지 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로 유리를 본 적은 없었다. 유리는 여중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은 여중에서도 유리는 축구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했지만, 따로 연락하려 한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 물은 적도 없었다. 유리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장은 유리가 혹시 나쁜 일에 연루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축구공을 커터칼로 매섭게 찢던 유리라면, 어쩌면. 장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고개를 저었다.


장민주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다만 선생님이 떠올려줬으면 하는 기억이 있어서 김유리 씨의 사진을 보여드린 겁니다. 그날, 김유리 씨가 선생님께 반창고를 내밀었었지요. 기억나십니까?

나가주세요.


장도 흐릿한 옛날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초면인 남자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저희는 다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손이 베였지만 피가 나지 않았었죠. 이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그날 그 사실을 눈치챈 건 장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피가 나지 않는 일은 없었다. 평범하게 넘어지면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났다. 굳이 왜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묘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어린 아이의 착각일 게 분명한 것을. 장은 짜증이 났다.


마지막입니다. 나가주세요.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지금껏 누르지 않았던 버튼을 누를 때가 온 거다. 이 사람은 장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다른 손님들처럼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해결방법은 오직 경찰을 불러 그를 내쫓는 것뿐이다. 하지만 장은 은연중에 알고 있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장은 편의점에서 해고될 것이다. 이 버튼은 그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장민주 씨, 당신은 지구인이 아닙니다.




로켓이 발사되는 순간을 기억한다. 그날 장은 학교에 있었다. 수업시간이었지만 선생님은 특별히 지상파 뉴스를 틀어주었다. 곧 온전히 우리나라의 기술로만 만든 최초의 로켓이 발사된다. 듣기로 영광의 주인공이 될 우주인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로켓은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제각기 로켓이 날아가면 어떨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 같으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로켓의 발사가 성공하면 우리나라가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 또 부정적인 영향, 여론이 어떤지…… 그리고 마침내 로켓이 발사되었다. 카메라는 다각도로 로켓이 날아가는 장면을 찍었다. 장은 그 장면을 흘끗 보다가 다시 책을 보았다. 장에게는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긴급호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난 건지.


한 차례 경찰이 다녀갔다. 경찰이 오기 전 국가정보원이라던 그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오시느라 고생했다고 장은 냉장고에서 에너지드링크를 꺼내 2인 1조로 온 경찰들에게 건넸다. 그들은 한사코 괜찮다고 손을 흔들고는 돌아갔다. 장은 에너지드링크 두 병을 연달아 마시고 CCTV를 돌려보았다. 낮이 되면 점장은 왜 긴급호출 버튼을 눌렀는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간 누르지 않았던 버튼을 눌렀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그리고 장은 점장이 어떤 화면을 보게 될지 궁금했다.


편의점은 CCTV는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갈지 몰라 구석진 곳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카운터 역시 다각도로 설치되어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다른 짓을 하진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점장이 설명했다. 네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예전 아르바이트생이 돈을 훔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 후로는 불안해서 이렇게 설치해놓았다고 했다. 장은 관심 없었다. 왜 남을 못 믿는다는 이야기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해야 할 건지.


CCTV 속 장은 오래 혼자 서 있다. 가끔 누군가 들어와 담배를 주문하고, 제각기 물건을 집어 카운터 위에 올리면 장이 계산한다. 봉투에 물건을 담아준다. 장은 그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화면 속에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 혼자서 말하고 있었다. 허공을 향해 무어라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 상기된 얼굴로 버튼을 누른다. 10분 뒤 경찰들이 온다. 장은 음료를 건네고, 그들은 받지 않고, 그래서 장이 마시고, 장이 CCTV를 본다. 장은 이제 CCTV를 끄고 카메라를 보았다.



한 번 쯤 생각해보신 적 없나요? 어쩌면 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요. 공상은 그런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한 소설입니다. 누군가 나의 정체를 알아채고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 음침한 상상을 하기 좋아했던 제가 좋아할 법한 소재죠.


편의점은 유일하게 제가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입니다. 사실 유일하지는 않고, 많습니다만. 보편적인 시점에서 볼 때 편의점은 접근성이 높고 누구나 많이 해보는 아르바이트이니까요. 근데 저는 안 했다는 겁니다. 열 가지 넘게 아르바이트를 했는데도요.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소설 속 조폭 마누라는 제가 들었던 별명입니다. 그때 왜 그렇게 남자애들이랑 싸웠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또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끝에는 다 화해하고 잘 지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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