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기 때부터 사진 찍는 걸 싫어했다고 한다. 100일 기념으로 사진을 찍을 때도 평소에는 얌전하던
내가 어찌나 울음을 터뜨리던지 애를 많이 먹었다고 아빠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는 그만
두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울 수도 있지, 괜찮다며 안절부절못하는 엄마를 진정시키고 몇 번이
나 나를 작은 소파에 앉혔다. 아빠가 나를 소파에 앉혀두고 카메라로 돌아가면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
려오고, 그러면 아빠는 다시 돌아와서 나를 앉혀두고. 그런 지겨운 싸움을 몇 시간을 했을까, 결국 아빠
가 승리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퉁퉁 부은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아니, 그 너머의 아빠를 응시
하고 있다. 아빠를 증오하고 있었다. 왜 나를 자꾸 이 의자에 앉혀두는 거지? 아빠 말대로 이제 막 100일
이 된 아기가 무엇을 알겠는가.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질 수 있었던 순수한 적의. 이 적의는 성장하던 나
의 몸 안에 칼로 새긴 듯 깊게 남아 나는 커서도 사진을 혐오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빠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기야 사진작가의 딸이 사진을 혐오하다니, 그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
었을까? 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아빠는 본인에게 복잡하고 귀찮은 건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었
다. 나는 그런 아빠가 너무 부러웠다. 나도 닮는다면 아빠의 그런 능청맞은 일면을 닮기를 바랬는데, 내
가 닮은 건 엄마의 굳게 닫힌 입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엄마는 말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혼자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눈물 흘리거나 혼자 화를 삭인다. 윤은 그러면 좋은 거 아
니냐고, 우리 엄마는 내 잘못도 아닌데 나한테 화를 낸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차라리 화내주기를 바랬
다. 엄마는 화가 나면 나를 투명 인간처럼 무시했다. 엄마의 일상에서 나는 철저히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필요한 어린아이였고,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문을 닫아버린 엄마에게 늘 애원하고 잘못했
다고 빌고 있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내 존재를 지우지 말아 달라고.
우리 전시회 가자.
윤이 말했다. 전시회? 무슨 전시회. 내가 묻자 윤은 아빠가 갖다준 표가 있다고 했다.
아빠 아는 삼촌이 전시회 열었대, 보러 가자.
싫어.
왜?
차라리 영화를 봐.
싫어.
둘이 놀고는 싶은데 마음이 안 맞을 때는 상황이 애매하다. 나도 윤도 서로 양보할 기미가 없다. 다른
친구와 놀까 싶어도 맞춰줄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서로 입술만 삐죽 내밀고 눈만 흘기며 신경전을
계속하다가, 결국 내가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윤이 씩 웃었다. 나는 윤이 웃는 걸 보고 따라 웃어버렸다.
웃음은 왜 전염되는 걸까.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못되게 말하고 싶은데. 배시시 웃으며 말해버렸다.
이번만이다?
고마워. 다음엔 영화 보자.
근데 너도 전시회 안 좋아하잖아.
아냐, 좋아해.
거짓말.
티 나?
어.
그냥, 프랑스 가기 전에 연습이지, 연습.
윤은 언젠가부터 프랑스 여행을 입에 달고 살았다. 수학여행 장소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알고서부터였
을 거다. 기왕 갈 거면 해외여행으로 해주지, 하며 투덜거린 것을 시작으로 윤은 외국여행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윤은 기왕에 떠날 거면 아주 먼 나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일본이나 중국처럼 가까운 나라는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거들떠도 안 본다고 했다.
그럼 미국에 갈 거야?
미국은 싫어.
왜?
총을 쏘잖아.
위험하긴 해.
나도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하루에도 몇십 명이 총기사고로 죽는다는 이야기를 “무기
팔지 마세요”라는 소설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정말 위험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
면, 총기로만 사람이 죽나 싶어서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죽는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니까. 미국에서도 총
기로만 사람이 죽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내 이야기에도 윤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사람이 만약이라
는 게 있잖아.
게다가 그 나라는 병원비도 비싸대.
그러게 총기가 싼가?
그런가?
그렇지. 일 있으면 죽어버리려고.
무섭네.
그렇지.
미국은 무서운 나라, 일본이랑 중국은 너무 가까운 나라, 대만은 모르는 나라, 홍콩도 모르는 나라, 당
장 출국해야 해서 얼른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윤은 꼬박 한 계절을 고민했다. 어느 나라로
가면 좋을지. 그저 여행일 뿐이었을 텐데 거기서 살 사람처럼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독일은 유학생한테
잘해주는데 말이 너무 어렵다…… 아 어쩌지, 어쩌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덩달아 고민에 빠져 있었
다. 그런 윤이 프랑스에 가겠다고 선언한 건 빵집에서였다. 이름에 파리가 들어가는 빵집에서 빵을 먹으
며, 윤은 오랜만에 맛있는 탄수화물을 먹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엄마랑 증명사진 찍으러 갔었는데, 엄마가 내 사진 보고 기절하려고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뚱뚱하냐고.
근데 내가 뭐가 그렇게 뚱뚱하냐?
윤은 며칠째 아침 저녁으로 샐러드와 닭가슴살, 고구마 따위를 먹고 있다고 했다. 나는 윤이 안타까웠
다. 다음에는 우리 아빠네 사진관으로 오라고 말했다. 아빠는 분명 윤의 어머니가 만족하는 만큼 윤의 살
을 깎아줄 수 있을 것이다. 가격은 깎아주지 않겠지만. 아빠는 딸의 친구라고 해도 공짜로 찍어주거나 값
2을 싸게 해주는 법이 없었다. 그게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우리 사진관으로 오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 내 사진들 때문이었다. 말해놓고 나는 실수했단 생각이 들어 급하게
덧붙였다.
근데 공짜는 아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윤이 새침하게 말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쩔쩔 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윤은 우리 아빠의 사진관에
오지 않았다. 늘 그랬듯 윤은 무심했고, 말했던 것을 까먹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전시회에 관해서 만큼은
잊는 법이 없었다.
엄마가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아빠의 사진관에 와서 일하는 아빠의 뒤쪽 소파에 앉
았다. 그 자리에서는 아빠의 뒤통수에 반쯤 가려진 모니터가 보였다. 모니터 속의 사람의 얼굴을 아빠는
확대해서 기미를 없애고, 주근깨를 없애고, 때로는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서 턱을 깎고 귀 모양을 둥글게
하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꼭 조각가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어릴 적 유치원에서 찰흙을 주물럭거리며 내
마음대로 사람을 빚어냈듯, 아빠도 마우스 커서로 사람을 새롭게 빚어내고 있었다.
가끔 아빠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아빠가 나를 모른 척하고 일에만 몰두해주길 바
랬다. 아빠의 시선이 싫었던 게 아니다. 이후의 일이 싫었던 거다. 아빠는 우리 딸, 심심하지? 라고 물은
뒤 나를 카메라 앞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안 심심해, 괜찮아. 그런 말을 할 새는 없
었다. 나에게 애초에 거부권은 없었다. 나는 카메라 앞에 앉아 아빠의 말대로 턱을 조금 아래로 내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오른쪽으로 조금 가라면 오른쪽으로 조금 가고 왼쪽으로 조금 가라면 왼쪽으로
조금 간다. 아빠의 카메라 렌즈에 맞춰 열심히 움직인다. 플래시가 터진다. 아빠가 이제 됐다고 말해도
나는 밤에 갑자기 환한 빛을 마주한 야생동물처럼 잠시 꽁꽁 얼어붙는다. 아빠는 그게 다 내가 긴장해서
라고 생각했다.
그거 알아? 딸, 옛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대.
잘 몰라서 그렇게들 생각했던 거야. 아빠는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가벼운 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말이 맞다면 어떡하지, 하는 내 속은 하나도 모른 채로.
아빠는 인화된 사진을 내게 주며 어때, 마음에 들지? 자랑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나는 사진관 한쪽에
걸린 거울을 한 번,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사진을 한 번 보았다. 다르다. 이 사진 속 사람은 누구지? 매번
받을 때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그날 아빠는 카메라로 내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물은 낯선 사
람이 든 사진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단 말 대신 어, 잘 나왔어. 라고 대답하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학생
증을 만들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학생증을 떨어뜨리면 사진만으로는 절대 나를 찾을 수 없을 거
란 생각을 했다.
사진관에는 아빠가 찍어준 내 사진이 가득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최초의 사진에
서부터 시작해서 100일 기념 사진, 유치원 생일파티 사진, 울고 있는 초등학교 입학 사진, 운동회 때 넘
어진 사진······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등학교 입학 사진까지. 쭉 보고 있노라면 이곳은 김다은 기념관 같
다. 아빠는 사진관을 내 사진으로 가득 채울 거라고 했다. 작은 사진관에는 이제 액자를 걸 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아빠는 라푼젤처럼 이 사진관에서 생활하며 남은 벽을 가늠하며 사진
3을 걸어둘 궁리를 한다. 집에는 내 사진이 단 한 개도 없다. 아빠의 사진도, 엄마의 사진도 없다. 윤의 집
거실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가족사진도 우리 집에는 없다. 아빠가 사진작가인데 왜 가족사진이 없느냐
고 윤이 물으면 나는 아빠가 바빠서, 라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사실 아빠가 있는 사진관에는 손님이 몇 없다. 워낙 후미진 구석에 가게가 위치해서도 있고, 주변에 더
좋은 사진관 많이 생겨서 그런 것도 있다. 그래도 오래 운영한 곳인데 단골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워낙
제멋대로 보정을 하는 사람이라 다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사진이 참 마음에 듭니다, 라고
말한 사람은 문화누리카드를 가져와 영정사진을 찍어달라 말한 할머니였다. 내가 왜 문화누리카드를 기
억하냐면, 아빠가 그 카드를 보자마자 여기서는 계산이 안 된다고 실랑이를 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안 된다는 아빠에게 다시 확인해달라고 강경하게 고집했고, 주민센터에 전화해서 확인해보고 나서야 아
빠가 착각했던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가맹점으로 가입을 해놓고서 까먹었네. 아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
기만 할 뿐, 할머니에게 사과하진 않았다. 할머니는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빠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찍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진을 내어주었다. 보정이라곤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사진이었다. 할머니의 염색이 덜 된 새치, 깊게 팬 주름, 검버섯, 눈 아래에 있는 화상 흉
터가 고스란히 남아 그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원래 아빠가 일하는 방식을 알기 때문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사진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는 액자를 안고 힘겹게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안녕히 가세요, 인사했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는 말을 들은 게 영 분한 모양인지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딸랑딸랑, 문 위
의 종소리가 몇 번 울리고 사진관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아빠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딸,
우리 짜장면 먹을까? 나는 또 바보같이 응 좋아, 대답하고 말았던 것이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나는 윤이 우리 사진관에 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끄러워 하는 나도 부끄러웠다.
다녀왔습니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돌아오는 대답은 따로 없었다. 나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내 방으
로 들어갔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닫아버렸다. 그렇다고 엄마가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말을 못하
게 된 것은 아니다. 그저,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혼자 슬퍼한
다. 내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왜 엄마에게 미움을 받고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최대한 책 잡히지 않고 엄마에게 예뻐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옛날에는 이유를 찾으려고 애썼다. 내가 잘못해서 엄마가 입을 닫았다고 생각해서 엄마의 옆모습에 대
고 엄마, 잘못했어요. 말해보기도 했다. 속절없이 기다려보기도 했다. 엄마의 입은 언제 열리는 걸까. 언
젠가 준비가 되면 다시 나를 봐주겠지. 하지만 그런 날은 없었다.
언젠가는 엄마가 나를 혼낼 때, 그 앞에서 개다리춤을 춘 적이 있었다. 다리를 덜덜 떨면서 우스꽝스럽
게 두 손을 위로 올리고 머리를 감듯 비비적거렸다. 혼을 내는 엄마가 무서워서 울면서도 춤을 췄다. 내
가 그렇게 하면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던 걸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를 혼내던 엄마가 내 춤을 보고
어떤 얼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엄마는 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거겠지.
엄마가 집에 돌아온 건 오랜만이다. 그간 엄마는 아픈 외할머니의 간병 때문에 내내 병원을 지키고 있
었다. 원래 외할머니의 간병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넷이나 있는 외삼촌들은 제각기 일이 바빠 어쩔
수 없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라 치면
누나가 옛날부터 장녀였고, 어머니가 누나를 참 아꼈고, 지금 나는 돈이 없고, 아내와는 별거 중이니 뭐
니 하는 쓸데없는 것들로 화제를 돌렸다. 엄마는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이야기
를 경청하고, 이야기가 끝이 나면 그제야 입술을 뗀다. 하지만 삼촌들은 엄마가 입을 뗄 차례가 되면 그
럼 누나 전화 끊을게. 발랄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엄마는 말할 기회도 없이 다시 입을
다문다. 열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외삼촌들의 말은 거짓말이다. 외할머니는 딸보다 아들들을 더 사랑했다. 외할머니 곁을 지키며
오줌통을 비우고 밥을 챙기는 등의 수발을 드는 건 엄마였는데도 외할머니는 외삼촌들을 더 사랑했다.
엄마와 있을 때는 입에서 불평이 떠나가질 않았다. 가슴을 쿵쿵 치며 갑자기 열을 올릴 때도 있었고, 다
리가 안 좋아 혼자 설 수도 없으면서 갑자기 침상을 벗어나려고 해서 엄마와 내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적
도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들이 오면 외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입가에 미소가 어찌
나 환한지, 나는 사람 입이 찢어지게 웃는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외할머니를 보고 이해했다.
아. 저러다 저 노인의 피부가 찢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 외할머니 뺨을 칠 뻔도 했다. 어디까지나 걱정해
서다. 할머니는 엄마를 보고 그렇게 웃지 않는다. 집구석에서 밥보다 눈칫밥을 많이 먹고 자란 나는 알
수 있다.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친절은 사랑이 아니다. 금쪽 같은 내 새끼, 어화둥둥 내 새끼.
외할머니는 엄마를 볼 때마다 품에 안고 그렇게 말하며 토닥거렸다. 가끔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 그때도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금쪽, 어화둥둥.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내 새끼란 말은 알았다. 어유, 내 새끼. 내 새끼. 뭐? 새끼?
새끼는 욕인데. 외할머니가 엄마한테 욕을 하네. 외할머니는 사랑하면서 엄마한테 상처를 주네. 나쁜 사
람, 참 나쁜 사람. 무엇보다 외할머니는 노골적으로 나를 미워했다. 나에게 새끼라고 하진 않았지만 얼굴
이 지 아빠를 똑 닮았다고 했다. 딸이 아빠를 닮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외할머니는 나를
칭찬하려고 저 말을 꺼낸 게 아니다.
정확한 이유를 몰랐지만 외할머니는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아빠에게는 대놓고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빠도 외할머니를 불편해했지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장모로 대우했다. 그 횟수
가 적었지만, 적어도 그랬다. 하지만 어린 나는 미워했다. 왜 미워하는 걸까. 나는 외할머니가 나를 미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엄마가 입을 닫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알지 못했다.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알아도 해결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나를 무시했다. 나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나와 정말 관계 없는 일이라면 왜 나를 미워하는지, 왜 내게 못되게 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
만 나는 얼굴은 아빠를 닮았어도 속은 엄마를 닮아서,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말을 오랫동안 입에 물고 있었다. 커다란 청포도 사탕처럼
입안에서 단내를 풍기며 구르는 그 말을 핥고 또 핥았다. 언젠가 작아질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다. 하
지만 좀체 작아질 생각은 못 하고 오히려 내 볼을 퉁퉁 붓게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울을 보면 오
5른쪽 볼이 동그랗게 튀어나온 못생긴 여자애가 되었다. 엄마, 나 얼굴 좀 봐봐. 하고 부르면 엄마는 심드
렁한 얼굴로 봤다가 김치 한 점을 내 숟갈 위에 올려주었다. 그럼 나는 볼이 아픈 걸 꾹 참고 그걸 또 그
대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무래도 엄마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 눈에는 많은 것
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혹시 모르니 병원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아빠에게 볼이 아파 병원을 간다는 문자
를 남기고 오전에 학교에서 조퇴한 뒤 병원에 갔다.
허어, 참 이상하네.
의사는 볼거리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한테 어떻게 볼 거리라고 할 수 있는가 싶어 욱하는
마음에 노려보았다. 의사는 요즘에는 예방접종을 해서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노
려보든 말든 그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의사는 물 많이 마시고, 충분히 자고, 얼음찜질을 해주라고
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진료비도 내기 싫었다. 나도 의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오든 저렇게 말
을 해주면 될 테니까. 밥 잘 먹고,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잠 제때 잘 주무세요. 맨날 이 소리야! 외할머니
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웃긴 건 외할머니를 보러 온 외삼촌들도 저렇게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죽었다.
나는 아빠 카드로 계산을 하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낮에는 학교에 있는지라 교복을 입고 한가한 거리를 걷는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핸드폰으로
볼거리를 검색해보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카메라를 켰다. 내 사진을 찍을까 말까 고민
하는 찰나에 버스가 왔다. 버스를 타고 나니 내가 왜 내 사진을 찍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윤과 메
신저로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프랑스에 가서 빵을 좀 사 먹고 싶다고 했다. 돼지. 내가 장난
으로 놀리자 윤은 프랑스에는 에펠탑도 있고, 루브르 박물관도 있다고 했다. 가서 말이나 통하겠냐는 내
말에 한마디만 외워서 갈 거라고 했다. 유명한 게 뭐에요? 유명한 걸 먹고, 유명한 걸 볼 거다. 나는 꽤 괜
찮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 유명한 게 뭔지, 대표가 무엇인지 보면 전체적인 윤곽이
보인다. 아빠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유명한 건 나다. 김다은.
외할머니는 아들들을 그리워했다. 통화도 잘 되지 않는 아들들을 어떻게든 보고 싶어진 외할머니는 내
게 가서 앨범 좀 가져오라고 했다. 들어가서 벽장을 열면 쌓여 있으니 그대로 가지고 오면 된다 말했다.
엄마는 그 무거운 걸 애가 어떻게 가져오겠느냐 말했지만, 내가 나서서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끽
해봐야 4x6 사이즈의 사진을 넣는 앨범밖에 본 적이 없어서, 분명 그런 앨범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
상 외할머니 집에 도착해 벽장을 열고 보니 아빠가 일하는 사진관에서나 보던 커다란 대형 앨범들이 가
득 쌓인 것을 보고 망연해졌다. 나는 그제야 왜 엄마가 급히 캐리어를 비워서 내게 들려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앨범에서 먼지가 날릴 것을 대비해 숨을 꾹 참고 하나하나 들어서 캐리어에 넣었다. 그런데
의외로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열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없는, 행복한 그 시절의 엄마와 외삼
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단란한 일상 같은 것을. 내가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 나버린 그들의
행복을 보는 순간 비참함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캐리어를 다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픈 허리를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높은 곳에 앨범 하나가 더 있었다. 할머니는 앨범을 모조리 다 가져오라고 말했
다. 할머니는 내게 어떤 앨범을 골라 가져오라고 말하는 일은 시간낭비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
가 나쁘고 말귀를 못 알아먹는 년이니까. 그러니까 뭘 생각하려고 들지 말고 그냥 싹 다 가져오라고. 나
6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그 앨범을 바라보았다. 마치 티 파티를 열 건데, 저기 앉아있는 멍청하게 생긴
곰인형도 끼워줘야 할까? 고민하는 아이처럼.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죽을 사람이니까 챙겨주자 마음 먹
고 까치발을 들어 앨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앨범은 무거웠다. 사진이 얼마나 많이 들었길래. 모서리만 잡고 끌어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팔이 저릿하게 아파올 쯤 아슬하게 걸터 있던 앨범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앨범 귀퉁이에 발등을 맞
았다. 너무 아파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망할 할망구. 절로 욕지거리
가 나왔다. 캐리어와도 살짝 부딪혀서 팔꿈치가 아팠다. 무슨 사진을 그렇게 욱여넣은 것인지, 앨범이 떨
어지면서 사진 몇 장이 떨어져 나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엄마의 얼굴과 마주했다.
엄마는 젊은 시절에도 내가 아는 엄마, 그 자체였다. 미미하게 불만이 배어있는 얼굴, 통통한 볼살에 비
해 어째서인지 잔뜩 야위어 패인 눈, 좁은 콧망울······ 나는 엄마의 증명사진을 손에 들고 한참 바라보았
다. 아마도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때 직은 게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사진 속 엄마는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
문이다. 나는 엄마의 처진 입꼬리 끝을 매만졌다. 아빠가 이렇게 화면에서 누군가의 입꼬리를 매만지면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참을 사진이 닳도록 매만졌을까, 정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게 나는 마침
내 엄마의 웃는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사진을 몰래 내 주머니에 챙기고 나머지 사진들은 보지도 않고 대충 앨범 사이에 끼우고 캐리
어에 넣었다. 소형 캐리어를 꽉 채운 앨범은 꽤 무거웠고 어린 내가 끌고 가야 할 게 아니라 외삼촌들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곁에는 외삼촌들이 없다. 있는 사람이라고는 외할머니의
딸인 엄마와 엄마의 딸인 나뿐이다.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욕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들을 채워넣었다. 내 팔을
빠지게 하기 위해 악을 쓰며 나와 줄다리기 하는 캐리어. 왜 옛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
간다고 믿었을까? 사진 속에 영혼이 박제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왜 몇 장씩 찍어도 나는 그대로일까? 그
러다가 깨달았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인지 누구인지, 갑자기 욕조에서 벌떡 일어나 알몸으로
유레카! 한 것처럼 나는 그때까지 나와 치열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캐리어를 탁 놓아버렸다. 캐리어 안에
서 앨범이 한쪽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신음처럼 들렸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의 영혼이 조금씩 옮겨가는 거다. 그러니까, 사진은 영혼의 일부다. 파편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나는 감탄했다. 다시 캐리어를 끌고 걸었다. 무겁다. 하지만 무거울 수밖
에. 나는 지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과 한때 내 엄마가 아닌 행복한 딸로 살았을 엄마의 영혼
을 끌고 가고 있다. 무거울 수밖에! 이렇게 생각하니 가벼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는 걸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사진이 영혼의 파편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나는 외가를 잘 안
다. 엄마를 잘 안다. 그들의 영혼은 풍부하지 않다. 이만큼 사진을 찍어서 영혼이 쪼개진다면, 이미 죽었
을 것이다.
볼거리는 의외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인터넷이 말한 대로라면 적어도 2주는 걸릴 거라고 해서 꼼짝없
이 한 달의 반을 우스운 꼴로 살겠구나 했는데, 일주일만에 가라앉았다. 아빠는 볼거리가 나은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했다. 볼거리가 걸렸다고 말했을 때도 아빠는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내 모든 순간을 기록하
고 싶다는 게 아빠의 설명이었다. 나는 사진관 벽에 그 사진을 걸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했다. 사진
7을 찍고 아빠는 의자 하나를 더 가져와 책상 앞에 두고 나를 앉혔다. 그리고는 볼거리에 걸려 볼이 툭 튀
어나온 사진과 볼거리가 다 나은 지금의 사진을 나란히 두고 보여줬다. 병원에 온 기분이었다. 아빠도 같
은 생각을 했는지 깨끗하게 나았다며 칭찬했다.
돌아갈 무렵에는 나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내가 너 때문에 살아. 아빠는 내가 한참 멀어져도 가게 밖에
서 나를 배웅하다가 들어갔다. 나는 아빠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뒤돌아서서 입에 고인 침을 바
닥에 뱉었다. 말갛고 거품이 인 것이 더러웠다.
돌아가는 길에 윤을 만났다. 볼거리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웠다. 예방접종을 했다면 옮기지
않겠지만, 예방접종을 안 했다면 옮을 수도 있다는 말에 윤은 고민하다가 그럼 나중에 낫고 보자고 했다.
엄마에게 물어보면 그것도 모르냐고 면박을 받을 것 같아 물어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해한다고 다 낫
고 보자 했다. 일주일만에 만나니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그간에도 메신저로 이야기를 해서인지 별
로 할 말이 없었다. 둘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서 흙으로 발을 차면서 지는 노을만 바라보는데, 갑자기
윤이 말을 꺼냈다.
내가 좀 찾아봤거든?
뭘.
루브르에서 뭐가 유명한지.
루브르가 뭔데.
아 왜, 프랑스 박물관.
아.
윤은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켜더니 검색해서 눈썹이 없는 여자의 그림을 보여줬다.
모나리자가 제일 유명하대. 여기서 유명한 것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대.
나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유명하지. 미술을 잘 모르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분명 유명
한 그림이 맞다.
왜 유명한지 알아?
몰라.
누가 훔쳐가서 그렇대.
왜 훔쳤대.
원래 이게 이탈리아 거라서 조국에 갖다주려고 했대.
루브르가 나쁜 새끼들이었네.
그치.
그래서 전시회는 언제 갈까?
다음 주말에 갈까?
그래.
그렇게 약속을 잡고, 쓸데없는 이야기만 잔뜩 하다가 헤어졌다.
하지만 다음 주말에 나는 전시회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윤은 괜찮으니 잘
다녀오라고 했다. 나도 갈까? 묻는데 오지 말라고 했다. 너무나 허무했다. 오랜 간병으로 엄마는 덤덤했
8는데 내가 심하게 울었다. 충격적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떠날 수 있구나. 외할머니가 죽던 순간, 나
는 학교에서 체육 수업을 듣고 있었다. 체육복이 없어서 운동장을 13바퀴나 달리게 생겼을 때,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마냥 좋았다. 아싸,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안 달려도 되는구나. 그리고 할머
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의 시체는 말끔했다. 잠든 것처럼 보였다. 더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 아플 수도 있는 거구나, 깨달았다.
외삼촌들은 나를 보고 어린 애가 영악해서 벌써 재산을 탐내고 저렇게 우는 거라고 쑥덕거렸다. 쑥덕거
리려거든 좀 멀리 가서나 할 것이지, 뒤뜰 주차장에서 담배 피우면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못된 이야기는 내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했다. 내가 엄마가 모시고 오래요, 하고 부르자 그들은 머쓱
한 얼굴로 담배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짓이겼다. 앞에 뻔히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좀처럼 슬퍼하는 인간
들이 없었다. 외할머니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속에서 열을 태우던 나만 외할머니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아빠가 찍어준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가 자기가 싫어하는 사위에게 사진을
받았다는 게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곧 돈을 아끼기 위해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납득했다. 외할머
니의 영정사진은 믿을 수 없이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달관했다는 듯, 노기 하나
없이 산뜻한 미소를 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울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외할머니가 사진을 찍었을 때 아빠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장모를 대하는 일이니 어려워서 쩔쩔
맸을까, 아니면 굳은 얼굴로 손님을 대하듯 대했을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서 두 사
람이 한 프레임 안에 잡힌 적은 없었다. 정말 기묘하게도 단 한 번도 스치지 않았다. 엄마라는 교집합을
사이에 뒀을 뿐 두 사람은 겹쳐지는 게 없었다. 아빠의 카메라 앞에 선 외할머니. 사랑하는 나를 가장 많
이 담았던 그 카메라로 외할머니를 담는 아빠.
언제나 그렇듯 아빠는 할머니의 얼굴을 매만졌을 것이다. 아빠는 모든 사진을 매만지니까. 적어도 돈을
받았다면. 그러자 헉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은 그때 그 할머니의 영정사진처
럼 아무런 보정이 없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영정사진 속 할머니는 너무나 온화하고 인자
하다. 우리 할머니가 아닌데, 아닌데……
외할머니 곁을 가장 진득하게 지킨 건 우리 엄마다. 그 사실은 외삼촌들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장례식의 상주는 첫째 외삼촌이었다. 거드름까지 피웠다. 원래 상주라는 게
더 일해서 힘들고 피곤한 자리니까 누님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검은 상복을 입은 엄마의 낯
은 더 파리하고 창백해 보였다. 엄마는 외삼촌이 하는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멀리, 높이 단 위에 올라
있는 외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외삼촌은 머쓱해하는가 싶다가도 문상객이 오자 한달음에 달
려나가 인사했다. 엄마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부축하려들자 팔
을 빼내었다. 나는 괜히 엄마를 부축하려 들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
듬었다. 나는 초밥을 처음 먹고 코가 찡했던 어느 여름날처럼 코가 시큰거려 참을 수 없었다.
윤과 학생증 사진을 나눠가졌다. 윤은 원래 증명사진을 찍으면 나눠 갖는 거라고 했다. 주변에서도 학
생증 사진을 찍었느냐며 서로 보여주고 나눠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별로 친하지 않은 애도 나한테 와서
학생증 사진을 교환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분명 여덟 장이었던 내 사진은 어느 새 세 장밖에 남지 않았
다. 윤은 자기는 두 장 남았다고 했다. 따지자면 너보다 내가 더 아까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넌 내 친
9구니까 특별히 나눠 갖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나는 내 사진을 머뭇거리며 건네줬다. 아까워
서 머뭇거린 게 아니었다. 창피해서였다. 아빠가 찍어준 내 사진은 누가 봐도 내가 아니었다. 윤은 내 사
진을 오래 보지도 않았다. 금방 비닐봉투에 챙겨넣고는 잘 나왔네, 한마디만 했다. 아마 저 사진은 오래
저 비닐봉투에 있겠지. 괜히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학교가 끝나고 나와 윤은 전시회를 보러 갔다. 윤이 전시회의 내용은 가르쳐주지 않아서 나는 전시회의
내용을 몰랐다. 전시회는 혜화의 어느 허름한 스튜디오 지하에서 열렸다. 나와 윤은 내 방만한 작은 전시
회장을 팔짱을 끼고 돌았다. 15분도 되지 않아 전시회장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걸린 그림들은 추상화
였다. 윤의 아는 삼촌은 우리가 둘러보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린 우리가 그림에 손이라도 대서
망쳐버릴까 감시하는 사람처럼 매서운 눈이었다. 그 등쌀에 떠밀려 더 빨리 그곳을 나왔는지도 모른다.
윤과 나는 근처에 있는 돈까스집에 와서 돈까스를 시켰다. 윤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프랑스랑 안 맞나봐.
갑자기?
도무지 예술이란 걸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빵은 맛있잖아.
그렇지. 근데 누가 먹을 것만 생각하고 여행을 가?
그럼 안 돼?
그건 아니지만은, 어쨌든.
말하는 도중에 돈까스가 나왔다. 자를 필요 없이 깔끔하게 잘려 나온 바삭바삭한 돈까스를 한 입에 넣
은 윤은 앗 뜨거, 뜨거. 호들갑을 떨면서 물을 따라 마셨다. 나는 그 꼴이 우스워서 키득키득거렸다. 윤은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아, 맛있다.
윤의 말을 듣고 나도 돈까스를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네.
행복하다.
윤이 말했다. 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아. 기름이 묻어 번질번질한 입술로 말한다. 째질 걱정은
없겠다는, 실없는 생각이 들어 나도 웃는다. 나도.
학생증이 나왔다. 아빠가 예쁘게 빚어준 내 사진이 가운데에 콕 박혀 있었다. 네임펜으로 학생증 뒤에
있는 내 이름을 몰래 지워버렸다. 앞에는 이름 위로 스티커를 붙였다. 이러면 혼나는데. 윤이 말했다. 나
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윤이 빤히 보다가 스티커 한 장을 더 떼서 붙여주었다.
내 생각에 나는 미적감각이 뛰어난 것 같아.
윤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목인 3x4는 증명사진의 사이즈입니다.
소설의 소재가 되어준 증명사진은, 포토샵을 유독 잘해주시던 저희 동네 사진관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현듯 소설을 쓸 때에 떠올라 이렇게 소설이 되었습니다.
이 소설 역시 사랑과 자전적인 경험을 많이 넣어 쓴 소설입니다.
20대에 쓴 소설들을 돌아보니 청소년 소설의 느낌이 많이 난다던 다른 이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연재는 31일까지 진행할 예정입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