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배려를 증명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하여
환승을 하기 위해 신도림역에서 내리면 엘레베이터 앞에 늘어진 두 줄의 가지런한 줄을 보게 된다. 줄 앞에는 모른 척 새치기를 하기 위해 서 있거나, 혹은 다음 엘레베이터를 타려는 의도를 가진 것인지 모를 사람도 있다. 대다수가 노인이다. 그 가운데 젊은이의 신분으로 줄을 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 말을 걸지 않더라도 흘끗흘끗 나를 보는 시선들은 나를 재단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디가 아픈데?"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 누구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내 스스로를 구태여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안다. 도리어 당당해지려고 애쓰지만 힘들다. 어떤 의미에서 엘레베이터 앞은 마치 진열된 몸의 경연장과도 같다. 누가 더 '약자'인가? 누가 더 엘레베이터가 '필요한 사람인가?' 닫히는 게 느려 한 번 오가는 데 텀이 긴 장애인용 엘레베이터. 하필 역에 하나씩밖에 없어서 늘 약자끼리 마피아게임을 하게 만든다.
시스템의 변화 없이 '누가 더 약자인가'를 겨루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쟁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힘든 이 상황에서 완전히 이상적인 복지 사회를 실현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요구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멈추지 말아야 하고 동시에 작게는 서로 약자 경쟁을 멈춰야 한다. 우리 마음속의 의심을 내려놓고 서로의 고통을 재단하고 증명을 요구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 그것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얼마 전 있던 일이다. 시장에 들렀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길, 중년여성이 버스기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앞 좌석에 젊은 사람이 앉는 게 맞습니까?"
나는 듣고 있던 음악을 멈추고 헤드셋을 내렸다. 버스 기사는 피곤한 목소리로 젊은 사람이 양보 좀 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들려오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자리에 앉은 여자는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자리 양보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뒤에는 좌석이 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중년여성은 그 말에 화가 났는지 언성을 낮추지 못했다.
"나는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내가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할 거냐"
나는 내가 당사자로 "젊은 것이 싸가지 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비난을 많이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장애인이고, 노약자석은 노인뿐만 아니라 약자도 앉을 수 있어요 말하며 권리를 주장했다. 나는 강한 확신을 갖고 말했지만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지하철에서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야? 하는 매서운 눈길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때 나는 누군가 날 도와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중년 여성에게 말했다.
"그건 아니죠. 젊은 사람도 아프면 앉을 수 있어요"
"서로 배려하고 살아야 해요"
옛말에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들 하던가. 내가 편을 들자 중년 여성의 분노는 우회해서 나에게로 돌아왔다. 너는 뭔데 끼어드느냐며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말에, 나는 장애인이고 아주머니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대답했다. 내겐 정말 남일이 아니었다. 그건 언젠가 나에게 있던 일이고, 또 언젠가 다시 또 있을 일이었다. 버스 안의 누구도 중년 여성의 말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젊은 사람의 편을 들고 있었다.
중년 여성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말했다.
"얼마나 아픈데!"
"저 사람이 아주머니께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누구도 "배려"를 받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그냥 그건, 당연하게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권리는 설득하거나 양보받는 것이 아니다.
결국 젊은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리에 앉아 가던 아주머니는 내리기 직전 내게 다가와 "싸가지 없는 년"이라며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평생 장애인"일 것이라 저주했다. 하지만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은 내게 모욕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버스에 내려 집으로 돌아와 많은 생각이 들었다. 괜히 끼어들었나, 내가 소란을 만들었나. 응원이 필요해서 참여 중인 커뮤니티에 말하자 모두가 내게 잘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경험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것들을 들으면서 나는 그때 젊은 사람의 편이 된 것에 "역시" 후회는 없다고 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만약 내가 아주머니께 내 자리를 양보하며 조금 더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언젠가 화가 난 사람에게 아주 조금의 공감을 건넸을 때 그 사람의 기분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본 적이 있다.우리도 서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최근 정부에서는 지하철 의자를 없애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태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시범운행되는 "의자없는 칸"을 보면서 낙담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두고 싸우는 약자들만 더 피 터지겠구나. 약자들만 불행할까? 아니다. 긴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는 직장인에게도 의자 없는 칸은 앉을 수 있는 일말의 기대조차 앗아가는 잔인한 칸이다.
함께 더 편안하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건 배려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다. 그런데 세상은 꼭 거꾸로 가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목소리를 내도 너무 작은 것처럼 느껴져 무력함에 잠식당할 때도 있다. 그래도 소리 내야 한다. 믿어야 한다. 세상이 아주 느린 속도라고 해도 분명히 선을 향해,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