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아니라, 상대의 요청을 기준으로 거절하기
나는 업무는 물론 업무외적으로도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이 또한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부탁을 들어준 사람이어서 등 이유도 다양했다. 나중에서야 이런 이유들이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땐 이미 내가 여러 요청을 동시에 승낙함으로 인해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나마 시간적 한계에 부딪히는 정도면 괜찮은데, 내가 생각한 상대의 선의가 다른 의도로 포장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헤어 나오기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자 정작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동은 자꾸 미뤄지고 밤늦게까지 상대의 요청을 깊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났다.
게다가 이런 나의 태도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만만하고, 좋은 상대가 되기 쉬웠고 상대적으로 일이 몰리거나 더 많은 업무를 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몇몇 사람들로 인해 나는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 아닌 책임감이 뛰어난 사람, 여러 일을 동시에 잘 처리하는 사람 등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창업이라는 경험을 통해 복잡하게 얽힌 업무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에 대해 경험한 나는 이런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었고, 실제로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쉽게 빠져버렸다.
이대로는 타인으로 인해 잘못 포장된 상황에 갇혀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물론, 업무에 대한 우선순위 등을 잘못 지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를 쉽게 인지하지 못하고, 나를 거쳐야 해결될 수 있는 업무가 오랫동안 제자리에 멈춰있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사실 비슷한 상황을 몇 번 겪었기에 무조건적인 ‘승낙'이 아닌, 적당한 기준에 따른 승낙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업무와 개인의 관점에서 특정한 요청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 습관적으로 수락하는 상황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고, 오늘은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거절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경험'이라는 유혹이었다. 누군가 제안해주지 않는 이상 스스로 진행하거나 떠올리기 어려운 것들을 여럿 진행할수록 나의 경험치는 더 쌓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는 모든 부탁과 요청을 쉽게 거절하거나 잘라낼 수 없었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하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하고 있는 일과의 연관성을 따져보기로 했다. 이 요청을 일정에 따라 진행했을 때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더 잘하게 될 수 있을까? 일에 필요한 특정한 능력을 더 키울 수 있을까? 등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꼭 업무와 관련된 ‘능력'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건 요청을 판단하는데 우선적으로 필요한 나만의 조건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조건이 생각보다 중요한 이유는, 요청이나 부탁을 듣는 순간 충동적으로 오! 재밌겠다! 와 같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해진 내용이 있다면, 일에 필요한 특정 능력을 세분화해 키워드로 나열한 것으로 내겐 대표적으로 글쓰기와 콘텐츠 제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업무 그리고 능력과 관련된 키워드를 추출해 활용할 수 있다면, 스스로가 부족한 점 그러니까 더 학습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상대의 요청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역으로, 내가 한 가지 제외한 기준이 있다면 ‘보상'에 대한 내용이다. 많은 보수 또는 인센티브를 앞세운 요청은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상대적으로 내가 포기해야 할 가치가 늘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미와 흥미에 따른 충동적인 판단보다 내게는 더 위험한 결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뉴스레터를 운영하며 작성, 발행한 콘텐츠를 종이책으로 출판해보자는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땐 ‘유료화'와 ‘수익화'에 대한 고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발행 주기를 흔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과 구성 역시 많은 변화가 필요해 기존 구독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란 판단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앞서 설정한 기준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정한 호흡에 따라 뉴스레터를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아니, 거절을 하는데 미리 생각까지 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힘들어서 못해- 시간이 없어서 못해- 등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로 ‘거절'의사를 밝히면 더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 상대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을 다시 돌아보면, ‘거절'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거절에 대한 이유'가 부족할 때가 많았다. 너는 그래도 해줄거지? 라는 마음으로 두 번째 요청을 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요청에 대한 답을 바로 하지 않고, 짧게라도 내용을 먼저 작성하는 게 도움이 된다. 한 가지 더 포함시키면 좋은 것은 상대가 누구냐 보다 요청사항에 집중하는 방법이다. 상대를 먼저 고려하면, 나 역시 수락의 이유로 자주 활용했던 것처럼 내 부탁을 들어줬기 때문에, 나와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등의 이유가 계속해서 비집고 나온다. 그러니 상대는 떼어두고 요청사항에 집중해 내가 지금 이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근거 등을 작성하고 생각해보자. 역으로 내가 거절을 당했을 때 역시 상대가 이유를 뚜렷하게 말해준 경우가 더 빠르게 수긍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등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내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는 업무 외적에 더 가까운 기준으로, 나의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는 방법은 일을 하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라는 양쪽 상황에 모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정해져 있으며, 업무와 업무외적으로 사용할 시간은 제한적이라 ‘우선순위'는 우리가 요청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우선순위는 업무와 업무외적 2가지를 분리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업무에서 우선순위는 개인이 아니라 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의견과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우리가 현재 진행 중인 업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맞지 않는다면 이는 ‘거절'을 고려해야 하는 대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만, 하겠다 하지 않겠다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팀원에게 언급할 경우 그 순간 이후 단계와 과정에서 배제될 수 있기에 함께 확인할 수 있는 별도의 문서 등에 기록한 뒤 다음에 다시 논의해보자 등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좋다. 우선순위에 밀렸을 뿐,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내용의 거절이 또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제안하는 등의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업무 외적인 상황에서도 나의 현재 상황을 잘 들여다보고 요청을 판단할 수 있는 단계가 필요하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등의 기준에 따라 내가 시간을 얼마나 낼 수 있는 상황인지, 현재 진행 중인 행동은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요청을 ‘수락'할 경우 먼저 진행해야 할 내용 모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정해진 시간에 따라 진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개인의 시간은 업무에 투입하는 시간보다 늘 부족하고, 업무의 바쁨 정도에 따라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업무 관점에서 우선순위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좋은' 의견이자 아이디어로 내용을 파악하는 것만큼, 누군가의 의견을 뒷받침 되는 내용 등이 없이 바로 거절하는 건 위험하다. 일하는 문화를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런 내용을 추가했으면 좋겠어요. 라는 의견이 회의나 미팅 중 나왔다고 해보자. 이때 우리 중 누군가가 그건 안될 것 같은데요.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라고 답하면 이후에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거절을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초 언급된 의견을 수정 또는 고려해 우리에게 더 밀접하게 연결되는 내용으로 제안하는 것이 좋다.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실제 업무에서는 서로의 의견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우선순위에 따라 의견을 거절할 때 하겠다, 하지 않겠다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바로 거절하기보다 좋은 의견이지만-이라는 맥락으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이 기능을 추가하면 우리의 특정 지표가 좋아질 것 같은데 이번에 반영해보면 어때요? 와 같은 의견이 있다면 좋은 의견이지만, 기능으로 검증하기보다 기존 데이터를 더 살펴보고 결정해보면 어떨까요? 등으로 거절의 의미를 담는 방법이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단호한 거절이 종종 필요하지만, 팀과 업무의 관점에서는 팀과 나, 나와 팀원의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전후 맥락을 고려한 거절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거절을 꽤 자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절 횟수가 늘어나면서 느낀 점은, 나의 거절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치명상을 입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거절했다는 이유로 ‘관계'를 들먹이는 사람이라면 다른 날, 다른 이유로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거절에 대한 서로의 아쉬움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이유가 거절 대신 승낙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니, 거절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기준에 따라 어떤 내용으로 거절을 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게 업무 관점이든, 업무 외 관점이든 조금씩 거절이 필요한 이유와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 07월, 제 첫 도서가 출간되었어요. 제목은 ’10년 차 IT 기획자의 노트’입니다. 브런치 '기획자가 일하는 방법'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사수 없이 일하는 어려움을 저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분들이 덜 느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는데요. 같은 맥락에서, 9개 노트(기록)를 바탕으로 기획과 PM의 주요 업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