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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Jan 24. 2016

언제부터 였을까 '관찰'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노란색이 아닌, 민들레 색


작년 봄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우리는 수원 행궁 근처의 벽화마을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민들레(MIN DLE LAE)'라는 공간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름부터 마음에 들었던 이 곳의 입구에 서서 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노란색으로  칠해놓으니...'였다. '멀리서도 눈에 잘 띄고, 흐린 날 어두운 마음을 밝게 만들어 줄 것 같고.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아'라는 말을 이어 붙이면서 말이다.      





2015년 이른 봄, 수원 행궁 인근의 벽화마을에서 만난 민들레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 봤던 곳. 집으로 돌아와 카페 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그곳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보내주었는데 그녀의 답장에 나는 잠시 멍- 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노란색'이라고 표현한 이 사진에, 아무렇지 않게 외벽에 칠해진 '민들레 색'이 정말 좋다며 산수유나무와 유채꽃, 달맞이꽃의 색들도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매력을 지녔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리곤 달맞이꽃의 꽃말이 '기다림'이라며, 달빛이 좋아 저녁에만 피었다가 아침에 시들다 보니 색도 달빛을 닮았다는 말을 덧붙여주었다. 


사진도, 메모도 나는 언제나 '관찰'을 통해 무언가를 담아내고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통해 그동안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단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으로만 '관찰'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흑백' 중

초등학생으로 이뤄진 그룹과 성인들로 이뤄진 그룹에게 각각 하늘을 자유롭게 표현해보라고 했는데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성인들은 90% 이상이 파란색 계열로 하늘을 표현한 반면, 아이들은 어느 하나 같은 색으로 하늘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 노란색이라는 표현
어쩌면 이렇듯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극히 대표적으로 만드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닮은 듯 다른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통화 이후, 민들레라는 이름을 보고도 노란색을 떠올린 재미없는 나의 생각과 시선들을 조금씩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것과 숨겨진 것을 발견하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렇게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닮은 듯 다른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2015년 겨울, 상수의 어느 카페





요즘만큼은 아니지만(한파경보가 내려질 만큼은 아니었으니) 그날도 많이 추웠던 겨울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기에 책 한 권을 들고 지인에게 추천받은 상수동의 어느 카페엘 들렀다.  들어서자마자 포근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고, 조금 일찍 찾아갔기에 혼자 조용히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곳곳이 마음에 들었지만, 주문한 음료를 들고 자리에 앉으며 다시 한 번 보게 된 것은 조명이었다. 











여러 개의 조명이 조금씩 다른 각도로 빛을 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겐 여행 중 어느 마을에서 보았던 확성기와 같아 보였다. 여행 중 우연히 지나치게 된 마을에서, 이장님의 구수한 목소리를 듣게 해주었던 확성기와 추운 겨울날 포근함을 더해주었던 성수동 카페의 그 조명이 묘하게 겹쳐 보였던 것이다. 


'관찰의 인문학'의 저작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본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의 생각들이 서로 포개져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민들레라는 공간을 보며 노란색이 아닌 달맞이꽃을 떠올릴 수 있고 달맞이꽃의 색이 달빛을 닮은 이유를 함께 이어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모양새가 같을 수도 있고
전해지는 느낌이 같을 수도 있다
그렇게 같은 듯 다른 대상이 서로 포개지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조금 더 깊어지지 않을까








그리고, 담겨 있는 이야기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서로를 포개는 연습과 동시에 꾸준히 노력해온 것이 있다면 스며든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는 일이었다.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에 따라 담긴 이야기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같은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소유자 또는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른 대상을 볼 때 위의 방법을 활용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모두 우리가 '우편함 또는 우체통'이라고 부르는,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소식이 잠시 머물러 있는 곳이다. 작년 12월에 작성한  '언제부터 였을까 보물 찾기'에서 슬며시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내가 스스로 보물이라 느끼는 것들을 볼 때마다 이렇듯 사진으로 담아놓는데, 우편함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혹여나 내게 도착한 소식이 다른 곳에 머무르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공간의 이름 바로 뒤에 우편함을 놓아두는 경우. 도착과 동시에 소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누가 나의 소식을 전해줄까 하는 호기심에 공간의 입구에 우편함을 걸어둔 사람. 붙이고 떼고 또 붙이고 떼고 사람들의 밀당에도 꿋꿋하게 소식을 보관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편함. 혹여나 추운 겨울 강한 바람에 우편함이 떨어지진 않을까, 그래서 누군가의 나를 향한 마음이 다시 되돌아 가지는 않을까 하는 근심에 테이프를 붙여놓은 사람까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더 쉬워졌던 것 같다
우리에게 말 못할 사연이 하나씩 있는것처럼
그들에게도 깊숙히 스며들어
쉽게 새어나올 수 없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라는






여전히 - 아! 전에 보지 못했던 거네, 라며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내겐 더 많다. 그래도 그 너머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하나씩 깨닫게 해주는 관찰의 시간이 요즘의 내겐 정말 소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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