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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Sep 25. 2016

그때, 그 찰나의 순간 '사각사각'

폭염이 물러가며, 우리에게 되돌려준 것들






폭염이 물러갔다. 지독하고, 유난히 길었던 올여름의 폭염이.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게, 걷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내게 여름은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폭염의 끝에 바로 가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여름이 끝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각, 사각
바스락, 바스락






2016년, 여름의 끝에 구매한 또 하나의 노트






얼마만이야, 이 소리. S펜 때문에 노트로 다시 돌아왔다지만, 여전히 무지 노트에 펜과 연필로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익숙한 내게 '사각사각, 바스락바스락' 소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메모장에 닿은 옷깃이 내는 소리가, 내 생각이 옮겨지는 소리가 이랬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염을 이겨내고자 사무실에 도착해 불도 켜기 전에 틀어놓던 에어컨 소리에, 오랫동안 묻혔던 소리들이 하나, 둘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폭염을 이겨보겠다며, 빵빵하게 틀어놓았던
에어컨 소리가 멎자, 이렇게나 다양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잠시 잊고 있었을 뿐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소리기 때문이 아닐까






2016년, 폭염이 물러가던 날 찾은 양재시민의숲 인근의 어느 카페






여름 내내 나를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가던 작은 USB 선풍기의 소리도, 사무실에 있는 고양이가 돌아다니며 투닥거리는 소리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소리도,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오가는 차들의 소리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수다 소리도. 모두 폭염이 물러가며 내게 남겨준 것들이자, 여름 내내 제대로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었다. 






폭염이 물러가며 우리에게 되돌려준 것 중
가장 반가운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리가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2016년 가을이 다가온 어느 날, 양재시민의숲






그날, 오랜만에 회사 주변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여름 내내 강하게 내리쬐던 햇빛이 조금씩 따뜻하게 느껴졌다. 에어컨 소리에 묻혀 그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도, 찬 바람을 가둬두기 위해 늘 닫혀있던 창문이 열리며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도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정적을 깨는 여러 소리들이 차례대로 귓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자연스레 발걸음이 느려졌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 귀에 꽂고 있었던 이어폰이
그날만큼은 주머니에 계속 들어 있었다
실내에서는 에어컨 소리에, 실외에서는 이어폰으로
이렇게 많은 속삭임들을 막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6년, 퇴근길의 버스






퇴근길까지도 이어진, 그날의 소리들. 다음날 출근길에는 좋아하는 음악이 다시 귓문을 잠궈버릴지도 모르지만, 한 번씩은 듣고 싶고, 기억하고 싶고, 느껴보고 싶은 소리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된 하루. 그날은 바로 폭염이 물러간 날이자, 일상의 소리들을 되찾은 날이었다. 





폭염이 물러가며,
당신에게 돌려준 소리는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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