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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방 고라니 Nov 19. 2021

그애는 분명 '사람 목소리'라고 대답했다

사람 목소리요.


그 애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다. 때는 중학교 음악 수업 시간이었다. 그날 음악 수업은 진도가 조금 빨랐고 선생님은 수업을 쉬어갈 겸 악기 이름을 주제로 빙고 게임을 하자고 했다. 각자 음악 공책에 빙고 표를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악기 이름을 채워 넣었다. 나도 피아노, 단소, 트럼펫 등 알고 있는 악기를 머리에서 짜내 표에 적었다. 순서는 선생님이 임의로 정했고 지목당한 학생들은 적당히 악기 이름을 말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사람 목소리라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목소리는 당당했다. 개성과 의사 표현을 두둔하는 요즘 분위기와는 달랐던 그때 그 대답은 상당히 낯부끄러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사실 튀려고 한 대답인 줄 알았다. 평소 장난기 많고 활발했던 애라서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튀려는 의도가 없진 않았던 것 같다. “악기 맞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악기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진지한 대답이 이어졌다. 칸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짜낸 답은 아닌 것 같았다. 음악 선생님도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훌륭한 악기인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게임 시작 전에 논의가 되지 않은 것이니 다른 악기를 한 개 더 말해달라. 이 정도의 뉘앙스였다고 기억한다. 빙고 게임의 기억은 이쯤에서 마무리된다. 흔한 빙고 게임이었지만 그 대화는 때때로 생각났다. 그 애의 이유 있는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선생님의 섬세한 존중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실 그 대화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내가 한창 직업군인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휴가를 나와 집에 갔더니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누나가 그 애 이름을 꺼냈다. “너희 학년에 000이라고 알아?” 흔한 이름은 아니어서 금방 생각났다. “응, 같은 반이었는데?” “진짜? 걔 아이돌로 데뷔했던데? 방탄소년단이라고 하더라.” 방탄소년단, 그때는 지금의 명성과는 달리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 하나였다. 이후 티비를 볼 때면 문득문득 그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음악방송을 일부러 찾아봤다. 중학생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애 얼굴을 보고는 신기하다 정도로 생각하고 이내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그 후 3년의 군 생활은 느리고도 정신없이 흘러갔다. 내가 전역할 때쯤 방탄소년단은 비틀즈와 비견되는 그룹이 되어 있었다.

     


     

BTS의 성공은 내겐 또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나는 톱 아이돌은 태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남달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흘러넘치는 재능, 그에 따른 배경, 적절한 운까지.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그 애는 엄청난 부자도, 주목받던 천재도 아니었다. 가수 준비를 위해 서울로 오가는 모습도 없었다. 그저 지방에서 학교 다니는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중학생이었다. 그래서 TV에 나오는 그 애의 모습과 중학생 시절의 모습의 간격이 더 멀게 느껴졌다. 중학교 이후 그 애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진 모른다. 단지 졸업하고 서울로 향했겠거니, 많은 도전과 노력, 인고의 시간이 있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사실 그 애의 소식 덕분에 나는 한 발짝 디딜 수 있었다. 나는 지방 국립대 이공계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뒤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동기들처럼 장교 출신을 살려 적당히 취업해야 하나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내게 그 애의 성공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사람 목소리라고 대답한 그 대화도 자꾸 생각났다. 음악에 진지했던 그 애가 어린 나이에 배경 없이 자신이 생각한 바에 도전했다고 생각하니 멋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이 내가 안정된 루트를 포기하고 글 쓰는 직업에 도전하러 서울로 온 계기였다. 그렇게 나는 잡지 기자가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을 도전하면 적당히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나는 일반 이공계에 취업한 대학 동기나 군대 동기들에 비해 연봉이 훨씬 적다.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떡값으로만 차 한 대 값을 받는단다. 만나서 술 한잔 하며 얘기를 나누면 딱히 돈 걱정하는 애들은 없는 듯 보였다. 집값 말고 먹고사는 문제에서 말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이렇게 벌면서 돈은 모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다. 유튜브에서는 5000만 원을 모으고 잘 굴리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말하던데. 그건 지금의 나하고 상관없는 얘기처럼 느껴진다.                




후회하진 않는다. 딱히 실패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많은 가치가 변하고 흔들리는 시대에서 이런 경험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연봉으로 집 살 수 있는 시대도 아니며, 돈을 생각하면 애초에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정 힘들면 다른 업계로 이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기사를 쓰고 글을 다루는 것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브런치에도 끄적일 글을 쓰는 것도, 어제의 나보다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좋다. 나는 지금 글 쓰는 내가 좋다.




다들 각자의 빙고 표가 있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먼저 채울지는 각자의 몫이다. 돈이 될 수도 있다. 좋다고 생각한다. 안정된 직장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 있다. 나도 그런 것들을 채워가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깨준, 용기를 한 스푼 얹어준 그 애가 새삼 고맙다. 오늘도 여전히 고민한다. 빙고 표를 내가 생각하는 것들로 먼저 채우고 싶다는 건 욕심일까라고. 적어도 오답은 아닐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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