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대방 고라니 May 26. 2022

누데이크 케이크

지난 토요일은 누나의 생일이었다. 나는 생일 선물 대신 최근 핫하다는 누데이크 하우스 도산에서 케이크를 예약했다. 자주 사 먹을법한 케이크는 아니었지만 인스타에 인증 샷이 즐비한 그런 케이크였다. 생일 당일엔 픽업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압구정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건물 앞에는 벌써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줄을 서서 현무암처럼 생긴 케이크를 픽업한 뒤, 최근 사당동으로 이사한 누나와 남성역에서 만났다. 누나는 주말 일찍부터 여기까지 와서 생일을 챙겨줘서 고맙다고, 이거 sns에서 봤다고 말했다. 응 그 말차 크림이 맛있다고 하더라, 그럼 갈게. 블로그 후기에서 본 내용으로 짧게 답한 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혹시 이질감을 느꼈다면 그 느낌이 맞다. 나는 누나와 친하지 않다. 친한 남매가 도대체 어디 있냐고 하지만은 그 결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그렇게 대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다. 오히려 사이는 나쁘지 않다. 원래 거리가 멀면 다 원만한 법이다. 


누나와 어색해진 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그 시작은 중학생 때부터다. 내가 중학생이 되기 한해 전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나름 가까운 지방 도시인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 시골이 얼마나 시골 같은지 잠깐 언급하자면, 그곳은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군위라는 곳으로 내가 살던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해 있었다. 유치원 통학을 위해 걸어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그런 동네였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15년 정도 살다가 자식 교육이라는 명분 하에 나름 큰 결단을 내려서 이사했다. 이사 후, 집은 조금 좁아졌지만 학교 학생 수는 10배 정도 많아졌다. 나는 모든 게 낯선 학교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 없었다. 그건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사회복지 쪽 일을 했다. 대전으로 나오면서 어머니는 익숙하던 청소년 쪽 시설을, 아버지는 새롭게 노숙인 자활 시설을 맡게 되었다. 그곳은 주로 신용불량자나 홈리스가 찾아오는 곳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는 좋아하던 테니스 대신 헬스를 하기 시작했고, 종종 전화 통화를 하다가 큰 목소리를 내곤 하셨다. 어머니와 누나는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 싸운다라는 단어보다 트러블이라는 단어가 적합했다. 누나는 날카로운 말로 짜증을 냈고, 어머니는 그에 대해 지친 듯 대꾸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당연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새로운 패턴에 맞추면서 삐그덕 대는 과정은 으레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시간은 여러 불협화음 속에서도 굴러갔다. 우리 가족이 이사한 그해 겨울엔 노숙인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차를 타고 가다 대전역 근처에서 노숙인이 보이자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겨울에 참 춥겠다. 그저 눈에 보여 내뱉은 말에 아버지가 답했다. 저 사람들도 알아서 잘 살아. 몸이 안 좋으면 119에 역에 사람 쓰러져 있다고 전화해. 그러고 누워 있으면 잠시 뒤에 구급차가 실어 가서 링거 맞혀줘. 셀프 신고 개념이지. 사실 저 사람들 도와주는 제도나 시설도 꽤 있어. 그런데 그 시설에 가도 술 먹고 사고 쳐서 다시 거리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 저 사람들은 그러니까... 사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야. 평소 말이 많지 않던 아버지가 웬일로 구구절절 긴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은 누구에게 했던 걸까


가족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누나 역시 종종 힘들다고 아니 외롭다고, 외로워서 춥다고 말했다. 그말이 무슨 뜻인지 둔한 나로서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나에게 누나의 호소는 그저 생떼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은 새로운 환경에, 직장에 적응하기 힘든데 누나는 불 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만 느껴졌다. 부모님을 향한 누나의 태도에 신물이 났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부모님도 힘든데 왜 철없이 구는 거야. 누나가 미웠다. 그런 누나가 한번 히스테리를 부리면 부모님은 쩔쩔맸다. 누나에게 약한 부모님을 이용하는 것만 같아서 더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의 철없는 생떼는 그저 생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힘듦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 즈음 누나의 삶 역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절 누나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방안에서 혼자 ‘상실의 시대’나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곤 중2병이 걸렸나 생각하기도 했다. 누나를 상당히 골칫거리라고 생각한 나의 인식과는 달리 누나는 학교에서 꽤 모범생이었다. 뛰어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고, 그 근방 시설이 좋고 기대를 받는 신설 고등학교에 1기 입학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누나는 2개월 만에 설립 후 첫 자퇴생이란 타이틀을 획득했다.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누나는 자퇴 후 1년 동안 집에서 지냈다. 그러면서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버티고 있는 부모님을 더 흔들어 재꼈다. 검정고시로 학교를 나온 엄마가 학교 생활에 대해 뭘 아냐고,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가시 돋친 여러 말로 부모님을 마구 찔렀다. 나까지 그 흔들림에 당하기 싫었다. 누나가 나에게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벽을 쳤다. 말을 섞지 않았고 늘 냉랭한 눈빛으로 누나를 대했다. 실제로 누나는 부모님께는 큰소리를 치다가도 나에게는 함부로 소리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누나는 누나대로, 나는 나대로의 방법을 찾았다. 


그 후로 나는 누나와 멀어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자퇴를 한 누나는 이듬해 새로 신설된 기숙형 공립고에 들어갔고, 나도 어쩌다 보니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곤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나는 성적과 진로, 친구 관계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런 문제들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적절히 잘 푸는 것에 집중했다. 2주에 한 번씩 집에 들렀지만 여전히 비슷한 태도로 누나를 대했다. 당시 부모님은 누나가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겼던 걸로 기억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쳐 놓은 벽을 허물 기회는 딱히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누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은 있었다. 대학과 사회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을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될수록 누나에게 미안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나완 달리 누나는 힘들 때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각자의 힘듦으로 누구도 그러지 못했고, 부정적 관심이라도 받으려는 누나의 짜증은 늘어만 갔다. 나는 그런 누나가 더 숨 막히도록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되는 상황들. 그 당시 우리는 서로 가시만을 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도 사과를 하진 않았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아니 못하는 나로서는 예전 기억을 끄집어내 사과한다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참고로 나는 가족에게 코로나 걸린 일도 말하지 않는 인간이다. 일상 공유도 하지 않는데, 부끄러울 만치 선명한 감정은 더더욱이다. 그런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선물밖에 없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여자 친구에게, 여자인 친구들에게 물어 누나에게 다양한 선물을 했다. 돈으로, 한 줌의 센스로 나름의 정성을 표현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말로 사과할 생각은 없으며, 어색한 관계를 풀 생각도 없다. 혹은 용기가 없는 걸 수도 있다. 



사실 이 글을 구구절절 쓴 이유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됐지만 여전히 용기는 없는 사람이란 걸 말하고 싶은 건지, 죄책감이라기엔 거창하고 미안함이라기엔 부족한 그 감정을 배출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무엇을 쓰고 싶은 건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람 피 말리게 무시해서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용기 없는 내가 향후 몇 년간 이 말을 전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