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해외여행
내 첫 해외여행은 3년 전 갔던 대만 여행이다. 당시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주말에도 가볍게 해외여행을 가는 요즘 편의를 생각하면 꽤 늦깎이인 셈이다. 휴학 없이 대학을 다녔다거나 군대에 꽤 오래 있어서 해외여행을 늦게 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다. 첫 해외여행을 제대로 즐길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린 거다. 나는 평소 그리 섬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대상에겐 섬세함의 깊이가 달라진다. 아껴두었던 영화를 집에서 볼 때처럼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게 된다. 섬세함은 대상에 담긴 어떤 진심일 수도 있다.
사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중국을 다녀오긴 했다. 그러나 난 그걸 해외여행으로 치지 않는다. 얼떨결에 교회에서 간 단체여행이어서 그렇다. 그저 무척 더웠고 기름진 음식과 뜨거운 차를 엄청 먹었던 기억이다. 다음 관광 도시로 이동할 때는 푹푹 찌는 날씨에 오래된 폭스바겐 차를 반나절 동안이나 타고 갔다. 샤오롱바오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밖에도 태산이라든가, 칭다오라든가 많이 갔었던 것 같지만 어쨌건 그건 내 첫 해외여행이 아니다. 첫 연애가 꼭 첫사랑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여행이라면 모름지기 설레는 기분부터 시작이다. 대만으로 떠나기 위해 기다리는 내 마음은 마치 어릴 적 첫 에버랜드 입장을 기다리는 아이 마음 같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설>, <남색 대문> 등의 대만 영화에 나오던 풋풋한 일상 풍경을 여과 없이 눈에 담을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복작거리는 시장 풍경과 사람들, 도로를 채우는 수많은 오토바이, 닭다리나 큰 고깃 덩어리를 턱 하니 얹은 간단하고 먹음직스러운 도시락 같은 것을 오감으로 맛보고 싶었다. 그들에겐 평범한 일상인 장면들. 그건 내겐 영화 장면 속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대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를 기억한다. 비행기 문을 나설 때 느껴지는 묘하게 습하고 이국적인 공기, 공항 전광판에 떠 있는 한자들, 공항 흡연 구역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는 비행기 옆 옆자리 꼬마 남자아이까지. 거의 모든 것이 새롭고 이색적이었다. 나는 그 찰나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해외여행을 위해 여러 준비를 했다고 그랬는데, 카메라도 그중 하나였다. 크롭형 바디지만 나름 성능이 괜찮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서 주말 클래스에서 열심히 배웠다. 전반적인 조작법과 함께 골든 타임(일몰 30분 전후)에서 가장 사진을 이쁘게 찍을 수 있는 설정까지 선생님께 전수받았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순간들을 여실히 카메라에 담았다. 진짜 해외여행이 시작됐다.
밤 비행기로 타이베이에 도착한 다음날 일찍이 호텔을 나섰다. 습기 머금은 공기 때문에 페인트가 벗겨진 건물 외벽과 수많은 오토바이가 이곳이 대만이노라 얘기하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건물이 많은 이유는 덧칠해도 습도가 높아 금방 벗겨져서 그대로 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자 바랜 건물 외벽이 대만의 풍경을 완성하는 퍼즐처럼 느껴졌다. 그런 것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다녔다. 내 여행 코스는 전형적이었는데 그만큼 보장된 즐길거리를 선사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으로 유명한 지우펀(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니라고 했다)에서 붉은 홍등 거리와 다식을 즐겼고, 바다 일몰이 아름다운 단수이에선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주걸륜과 계륜미가 걷던 학교 잔디밭을 걸었다.
여행에서는 유명 관광지도 기억에 남지만 가끔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들이 더 짙게 남곤 한다. 그건 보편적인 즐거움이 아닌 나만의 즐거운 순간으로, 대만 여행이 나의 여행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는 오감으로 한껏 기록한다. 해가 천천히 바다로 잠기는 단수이의 일몰이 지나면 거리는 더욱 반짝이기 시작한다. 한쪽으론 밤바다와 검푸른 강이, 반대쪽엔 다양한 색채를 발하는 가게들이 늘어져 있다. 중간중간 서 있는 가로등 스피커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서로 팔짱을 낀 사람들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걷고 있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된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순간이 행복하다.
지난 주말에 홍루이젠을 먹다가 대만에서 좋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을 글로는 기록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펜을 들었다. 기억은 흐릿하면서도 그때 느낀 감정과 기분이 더해져 기억의 색채는 더욱 진해진다. 타이베이 101 타워 앞마당에는 LOVE라는 시그니처 조형물이 있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부녀에게 사진을 부탁했었다. 그 부녀도 여행을 온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그 부녀의 사진도 찍어주었다. 나는 사진 찍어주는 순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LOVE 앞에서 각자의 하트를 만들어 환하게 웃는 그들의 모습이 이뻐 보였다. 문득 우리도 그렇게 보일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 순간을 놓칠까 싶어 얼른 셔터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