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프로필을 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근황이 궁금한 건 아니었고, 생일 알림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생일을 보던 중 한 이름이 눈에 띄었다. 윤아 누나, 어릴 적 옆집에 살던 누나였다. 연락처가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 이름을 몇 년 만에 본 듯했다. 그만큼 잘 떠오르지 않던 사람이었다. 누나의 프로필에는 2살 정도 된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3년 전쯤 누나의 결혼 소식을 들었던 게 얼핏 생각났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는 제한적인 상황이라는 대외적인 이유로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 사진을 보니 누나의 결혼 사실이 새삼스러워 연락하고 싶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핸드폰 화면에 정아 누나라는 이름이 뜨며 통화 연결음이 울렸다. 이 누나의 이름이 여러 개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났다.
나는 어릴 적 상당한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산 중턱 이름 모를 냇가를 끼고 형성된 마을이었다. 우리 집은 냇가 바로 옆에 자리했고, 정아 누나네는 우리 집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이었다. 요즘에야 옆집은 진짜 옆에 있는 집이지만, 옛날 옆집은 다정한 이웃이었다. 물론 다정한 이웃이기 위해 부단하고 자연스러운 노력도 있었다. 김치를 나눠 먹는 건 예삿일이었고, 고기라도 구울 때면 가족 전부까진 아니더라도 애들만은 꼭 서로 불러서 먹이곤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25년 전까지만도 그게 일반적이었다.
정아 누나네는 조금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 집엔 정아 누나와 3살 터울인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유독 정아 누나만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렸다. 옆집 할머니는 은정, 아주머니는 정아, 아저씨는 윤아나 정아라고 불렀다. 우리 집은 거의 정아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은정, 윤아, 정아. 각각의 이름에 공통점이 있지도 않아 정말 오롯이 세 개의 이름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살면서 언젠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 피붙이가 있다면 이름을 같이 엎쳐 부르는 경우가 있다고. 그러나 당시에 나는 그런 게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정아 누나의 이름이 3개나 된다는 것이 부러웠다.
내가 5살이 되었을 때 정아 누나에겐 새 동생이 생겼다. 옆집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남자애였다. 성격이 불같고 목청이 큰 옆집 할머니는 아기가 태어난 뒤 고함보단 함박웃음을 자주 뱉었다. 할머니에게 그 애는 존재가 기쁨인 듯 보였다. 나도 가끔 그 갓난애와 놀아주었다. 아니 사실 부러워서 자주 놀러 갔다. 나는 평소 옆집 자매와 고무줄놀이를 하며 놀았다. ‘월남 마차 타고 가신…’을 연신 외치며 뛰는 나를 보고 옆집 할머니는 사내애가 고무줄 뛰면 고추 떨어진다고 말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고무줄을 뛰고, 아기도 돌보면서 놀았다. 그러고 집에 가선 어머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졸랐다. 옆집은 이름도 3개고, 동생도 있고 뭔가 많이 가진 것만 같았다.
2년 동안 꾸준히 졸랐던 탓일까. 7살이 되던 해, 내게도 동생이 생길 거란 기쁜 소식이 들렸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띤 태아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는 뭐가 태아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사진을 만졌다. 워낙 초기였기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얘기 말라고 했다. 하지만 들뜬 나는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곧장 자랑하고 말았다. 곧 그 소식은 동네에 퍼졌다. 아이들은 모든 걸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니까 말이다. 유치원에서 나는 곧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시기에 종종 힘든 모습을 보였다. 안방에서 옆으로 누워 진통을 견디는 모습이었다.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그 기간에 동생이 언제 생기냐는 질문도 자주 그리고 여러 방면으로 들었다. 그때마다 잘 모른다고 답했다. 정말 잘 몰라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느 날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애들이랑 선생님이 동생 언제 생기냐고 자꾸 묻는데 뭐라고 해?”
“음... 안 생긴다고 말하면 돼.”
“응? 그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돼.”
나는 그게 왜 거짓말이 아닌지 여러번 묻지 않았다. 왠지 정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날부터 동생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아니 거즌 10년에 한 번씩 이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살면서 두 번 정도 했던 것 같다. 유산했던 어머니의 아픈 기억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잘 기억나질 않는다. 몇 주차에 그렇게 된 건지, 어떠한 연유로 그런 건지 말이다. 티를 잘 내지 않는 내 성격이 어머니에게서 왔듯, 어머니도 그에 대해 티를 잘 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일련의 과정을 잘 모른다. 그저 태아 사진을 내밀었던 날처럼, 어느 날 그 소식을 들었었다. 이후 나는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이름을 3개나 가진 정아 누나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정아 누나와의 통화는 간단했다. "…. 응 그래, 나중에 대구 내려가면 보자" 특별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요새 어떻게 지내냐 정도의 안부만 물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어떤 연유인지 모를 정아 누나의 이름들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건 분명 많은 사랑으로 인해 생겨났을 터였다. 누나와 연락하다 10년 짜리 일화가 떠올랐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기억과 감정이겠거니 했다. 물론 살면서 간혹 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그때마다 혹시 어머니는 어땠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 마음을 감히 헤아려 보려는 것이 건방진 것 같아 금방 생각을 접는다. 마지막엔 그저 태명을 몰라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