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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방 고라니 Apr 19. 2022

좋은 글은 잘 정돈된 내면에서 나온다

유지혜 페이퍼

나는 편지를 받으면 바로 보지 않는다. 대학 졸업식 때 후배들에게 받았던 롤링페이퍼도, 군인 시절 헤어지면서 받았던 편지도 그 자리에서 펼쳐보지 않았다. 편지를 음미하기 위해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보통 카톡보다 무겁고, 책보단 가벼운 편지는 티타임 때 먹는 티와 디저트 같다고 느꼈다. 그 한 입은 가끔 은은하고 충만한 행복을 가져온다. 음미할 수 있는 것의 첫 입은 소중하며, 내겐 편지도 그렇다.         


      

요즘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편지가 있다. ‘유지혜 페이퍼’다. 유지혜 페이퍼는 에세이 작가가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다. 그녀가 보낸 편지 역시 조용히 즐길 수 있는 방안에서 열어본다. 그때는 보통 정신 없는 하루를 마무리한, 자기 한 두 시간 전 쯤이다. 온수 샤워를 마치고 노곤한 기분으로 메일함을 열면 버릴 것 하나 없는 문장이 한 가득 들어있다. 사실 그전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엿보긴 한다. 그녀의 편지가 오긴 왔는지, 오늘은 어떤 글을 보냈는지 제목만 흘깃 볼 때도 있다. 그녀의 편지는 사람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녀의 글을 발견한 건 올해 초다. 평소처럼 직장 근처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표지를 보고 끌리는 책을 몇 장 혹은 한 챕터 정도 읽다가 책을 사곤 한다. 서점에 갈 때마다 책을 사진 않지만 아이쇼핑하듯 둘러보며 노는 걸 즐긴다. 그날도 그냥저냥한 마음으로 가볍게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에세이 코너에서 MZ 세대 문학의 아이콘이라는 카피를 보고 무심코 책을 집어 들었다. 감성 글귀를 모아 놓은 책인 걸까 생각했다. 에세이 한 편을 읽고 내 생각이 틀렸단 걸 알았다. 그 안에 있는 문장은 평범하지만 자연스러웠고 정확했으며 개인적이었다. 그녀의 문장은 내 지갑을 열기에 충분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 유지혜 -



좋은 글은 잘 정돈된 내면에서 나온다

힙합 평론가이자 글쓰기 책의 저자인 김봉현 작가의 지론 중 하나다. 그녀가 쓴 에세이를 읽고 나서 위 문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잘 쓴 영화 리뷰 같다고 생각했다. 딱딱하다는 뜻은 아니고 대상과 자신의 정서를 깊게 탐구해 철저히 분석했다는 점에서다. 평범하지만 그곳에 응당 있어야 할 문장들로 정확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가벼운 것은 가볍게, 무거운 것은 무겁게 썼다. 그녀의 글은 날카롭진 않았으나 내면을 날카롭게 짚어주었다.   

            


나는 그녀의 글에 반했다. 그날로 책을 사고 인스타를 팔로우했으며 뉴스레터인 유지혜 페이퍼까지 결제해버렸다. 아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뉴스레터를 신청할 수 있도록 때맞춰 책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그녀가 보내주는 편지로 편리하게 영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면을 정리하고 영감을 얻기까지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한 달에 만원은 저렴한 값이라고 생각한다. 단돈 만원으로 밤마다 음미할 수 있는 글을 받을 수 있다니. 나는 기꺼이 그녀의 생각과 치열한 시간을 샀다.      


유지혜 페이퍼


그녀의 편지는 매일 결이 달랐지만 받을수록 좋았다. 때론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때론 여행에서 발견한 빛나는 순간들을 기록해서 보냈다.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었으며 숙제도 매일 있었다. 그녀의 편지는 단순 메일링이 아니었다. 대상과 답장을 주고받으며 그녀와 독자만의 페이퍼를 만들어 갔다. 얼마 전 유지혜 페이퍼의 마지막 메일이 왔다. 그녀는 첫 시작처럼 시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너도 나도 섬이었구나.

우리가 만나 서로 허물을 안아주면서

말의 물길을 통해 경계가 무너지는 섬.

모든 완성은 눈과 눈을 합친다.

모든 완성은 멀고 막막한 하나다.

마종기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83p.


굿바이 레터를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의 편지를 기다린다. 다음 시즌의 유지혜 페이퍼를 기꺼이 기다릴 것이다.



작가님, 지난 한달 동안 선물 같은 편지 보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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