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그날은 부슬비가 내렸다. 공원 변두리를 천천히 걷고 있으면 가로등 불빛이 이따금 머리 위로 지나갔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열심히 분무기를 뿌려대는 것 같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백광을 받아 반짝였고, 그게 눈에 선명했다. 우리는 비를 피해 숲길로 들어갔다. 그곳 역시 물기가 가득했다. 침엽수 사이로 혹은 침엽수를 따라 물이 똑똑 떨어졌다. 그 길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공원이 참 이쁘다고, 좋은 산책길이라고 말이다.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나는 몇 개월 남짓한 기자 교육을 받고 막 취직한 터였다. 낮엔 기사를 썼고 저녁에는 운동을 했다. 단조로운 삶이었다. 물론 낮 동안은 단조롭지 않았지만 퇴근 후엔 딱히 복잡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코로나가 한창 성행하던 중이라 사람을 만날 일도 없었다. 사실 내 경우엔 그리 만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밥 한 끼 할만한 친구들은 대부분 취직해 경기도 쪽에 살고 있었으며, 그나마 서울서 지내는 친구들은 죄다 무슨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끔 소개 비슷한 만남 건도 들어왔으나 나가보면 대부분 가벼운 만남이었다. 보통 홍대나 합정에 있는 밥집과 이자까야를 거치며 비슷한 얘기를 되풀이했다. 그런 만남이 어디에 도달하긴 어려우므로 언젠가부턴 그냥 소개를 거절했다. 예컨대 술친구를 소개해준다는 그런 만남 말이다. 나는 자연스레 퇴근 후엔 운동이나 했다. 그게 편했다.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근처 커다란 공원을 지나가야 했다. 나는 그 점을 좋아했다. 싱그러운 초록색과 공원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날도 운동 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초입을 지날 때 문득 낯익은 얼굴이 지나간 것 같았다. 돌아볼까 하다 어차피 아는 체하지 않을 거라 발걸음을 유지했다. 나는 원체 낯을 가린다. 그러니까 몇 번 안 본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열에 아홉은 모른 체하고 잰걸음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평소처럼 지나쳤다. 왠지 한번 돌아보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카톡이 왔다. 혹시 방금 공원 지나가지 않았어요? 그녀였다. 그녀에 대해 잠시 말하자면, 당시 나는 그녀를 게임 못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첫인상이 그랬다. 실제 첫 만남이 어땠는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본 곳은 교회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닌 크리스천이었고, 상경해서도 금세 다닐 교회를 찾아냈다. 어떤 단체든 처음엔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자리는 이를테면 대학교 신환회나 회사 단합회 정도 되는 자리였다. 나는 열심히 사회성을 발휘해 소개를 했고 함께 마피아성 보드게임을 했다. 그중 그녀가 단연 눈에 띄었다. 게임을 꽤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침착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게임 도중 내내 우왕좌왕했다. 급기야 설명서를 가져가더니 게임 내내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늘 궁지에 몰렸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 모습이 재미있어 일부러 그녀를 몇 번 공격하기도 했다. 초등학생처럼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카톡이 왔다. 뭔가 평소와 다른 저녁이었다. 나는 적당히 텀을 두고 신경 써서 카톡을 보냈다. 어쨌든 교회 생활도 잘해야 하니 말이다. 너무 빨리 읽지 않으면서도 대화 흐름은 끊기지 않도록 했고 그건 2~3분이 아주 적당했다. 다음 카톡도, 다음다음 카톡도 그렇게 보냈다. 몇 번의 2~3분이 지나고 난 뒤 우리는 한 번 보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근처에 운동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하니 그녀는 근처에서 일한다고 했다. 음악 학원을 하고 있다고,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었기에 나는 냉큼 알겠다고 답했다. 나는 왜 냉큼 답을 했을까. 단조로운 삶이 조금은 지겨웠던 걸까. 게임을 너무 못하는 그녀가 조금은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다음날 그녀가 일하는 학원에 놀러 갔다. 말을 놓으라길래 말도 놨다. 한 시간 남짓 얘기한 다음, 나는 그녀에게 다음에 보자고 말했다. 왠지 카페에 가자고 하면 그녀도 갈 것 같았지만 권하진 않았다. 물론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카페에 흔쾌히 갈 거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단지 그러지 않았던 건 그녀와는 한꺼번에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얘기하고 싶은 것이 많을 땐 조금씩 얘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그녀는 인사하면서 내게 동네 주민이니까 자주 보자고 말했다. 동네 주민, 나는 아마 술친구보단 동네 주민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 뒤로 2주 동안 나는 동네 주민인 그녀와 두 번 정도 밥을 먹었다. 그사이 혼자 강릉 여행도 다녀왔으며 그녀에게 엽서와 커피콩 빵도 선물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가 근처 큰 공원에 갔다. 거즌 매일 지나쳤던 그 공원 말이다. 비가 살짝 오고 있었지만 마침 내가 우산을 챙겼기에 잠깐만 걷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걷고 있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가 궁금했고,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궁금했다. 복잡한 생각과 마음이 들던 중 문득 나쓰메 소세키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나쓰메 소세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 일화가 떠오른다. 영어 수업 도중 한 학생이 ‘I love you’를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번역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번역을 정정했다. 일본인들은 직접적으로 사랑 고백을 하지 않아, ‘달이 참 아름답네요’ 정도가 적절할 것 같네. 물론 이 일화는 꽤 부풀려진 부분이 있다. 마치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래도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꽤 재밌게 읽은 터라, 그가 충분히 그런 말을 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원을 걸으면서 나쓰메 소세키를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가 옆에서 물었다.
나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묻고 싶던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순간 머리가 쭈뼛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막상 당황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실 내가 답할 수 없어서 먼저 묻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에 반해 그녀는 게임은 못하지만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생각하냐니...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 그녀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진 않은 터였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녀가 많이 궁금하다고, 그리고 같이 길을 걸을 때 산책길이 이쁘다고 말이다.
그랬던 그녀와 나는 몇 년간 잘 만나고 있다. 그리고 요즘 나는 다음 고백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참 말솜씨가 없고 승부사 기질도 없기에 큰일이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먼저 잘 말해보려 한다. 함께 살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