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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방 고라니 Oct 22. 2023

Not love letter

내겐 여자친구가 있다. 나보다 1살 많은 그녀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나보다 훨씬) 착하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있는 나를 향해 오랜 친구들은 말한다. “또 연상이야? 너는 항상 연상만 만나냐. 지겹지도 않아?” 맞다, 나는 이제껏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심지어 짝사랑 대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진짜로 좋아한 적은 없었다. 이런 것도 페티시라 볼 수 있나.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 취향이 확고하다는 거다. 



사실 예외가 딱 한 번 있었다. 약관의 나이, 20살이었다. 갓 입학한 당시의 나는 대학의 낭만을 꿈꾸고 있었다. <4월 이야기>와 <상실의 시대>를 좋아한 내가 대학의 낭만을 가지지 않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지금에야 좀 철없는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그땐 그런 게 가능했다. 1학년 학점 정도는 적당히 뭉개어도 되는 시절이었다. 내가 제일 바랬던 건 캠퍼스 잔디밭을 거닐고 싶은 어느 누군가였다. 그 누군가에게 억눌러 왔던 연애 감정을 마음껏 쏟아 보고 싶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 일을 위해선 누군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좋아할 만한 선배를 마땅히 찾지 못해서였는지, 나는 처음으로 동갑내기에게 눈을 돌렸다. 짝사랑 대상이 동갑까지 내려온 건 그녀가 처음이었다.



혜지, 지혜란 이름은 많이 봤지만 혜지란 이름은 처음이었다. 친구의 친구로 알게 된 그녀는 털털하고 꽤 예뻤다. 사실 친해진 사람 중 그렇게 이쁜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녀와는 뭐 이리 처음이 많은 건지, 꽤 정신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포함된 친목 모임 역시 처음이었다. 우리는 주로 대학 후문 치킨집에서 모였다. 그녀는 순살 치킨 위에 치즈스틱, 떡, 감자튀김 따위를 마구 얹어주는, 조금 어두컴컴한 그 치킨집을 꽤 좋아했다. 치킨무도 좋아했다. 그녀는 치킨이 나오기 전 항상 무 몇 개를 입에 집어넣고는 일부러 아삭거리며 씹었다. 그런 버릇이 있었다. 나도 별생각 없이 따라서 먹었다. 치킨무는 아삭하고 싱그러운 맛이었던 것 같다. 치맥을 위한 모임도 아니었건만 우린 기를 쓰고 모였다. 왠지 매저녁을 그냥 흘려보내선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그맣고 하얀 무를 연신 씹는 그녈 보면서, 조금씩 천천히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무 먹는 모습을 보다가 좋아할 수도 있나. 그것 역시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또 의도적으로 그녀와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 역시 그걸 자연스러워했다. 같이 함께한다는 것, 그녀의 친구로서 인정받은 것 같았다. 게다가 객관적으로도 꽤나 이쁜 그녀와 캠퍼스를 함께 다니는 일은 정말이지 나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도서관 자리 잡기, 벚꽃 구경 등 모임 속 그녀와 캠퍼스 낭만을 같이, 또 몰래 즐겼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학 방학을 맞이했고 나는 그녀와 떨어지게 됐다. 처음 맞은 대학의 방학은 생각보다 더 지루했고, 약간은 허무했던 것도 같다. 



그해 가을 학기는 봄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날이 더욱 추워졌을 무렵, 우리의 관계는 다행히 전과 비슷하진 않았다. 그녀에겐 크리스마스이브에 고백했다. 고백은 처음이라 카톡으로 했다. 최악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새해가 밝아서야 내게 좋다고 답장했다. 그녀가 왜 받아준 건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뒤에도 나는 최악이라고 여길만한 짓들만 골라서 했다. 이를테면 자취방에서 여학우들과 술을 먹는 일 같은 거다(당시 내 자취방은 아지트였다). 심지어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들이 학우들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도배됐고, 당연히 그녀의 피드에도 등장하고 말았다. 물론 나는 그 자리에서 여자친구 자랑만 해댔기에 떳떳했다.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몰랐다는 말이다. 당시 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내 감정에만 막연히 취해 있었다. 결국 내가 그녀의 타임라인에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3개월 만에 헤어졌다. 끝이 아름답지도 않았다. 막연한 욕구의 말로는 대체로 이렇다. 그녀와 헤어진 날은 맥주 말고 소주를 먹었고, 혼자 있고 싶어서 늦은 저녁 빈 강의실에 찾았다. 울고 싶었지만 울음이 잘 나오진 않았다. 당시 난 연애도, 이별도, 온전히 잘 우는 것에서조차 서툴렀다. 빈 강의실에 앉아서 생각했다. 뭐든 처음인 건 그런 걸까. 처음 먹은 술, 처음 폈던 담배, 그런 첫 경험들과 비슷하게 참 허무하게, 신선하게, 정신없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SNS 계정도 모른다. 아, 그때 피드 올린 여자애들 연락처는 남아있다. 가끔 인스타에 좋아요도 눌러준다. 돌아보니 진짜로 남은 게 없다. 굳이 찾자면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생각 정도였을까. 



연말연초가 되면 가끔 생각난다. 처음이라 특별하게 설렜고, 설렌 만큼 더 서툴렀던 연애가 말이다. 그녀가 그립진 않다. 그냥 첫 연애와 그 감정이 언뜻 떠오른 거다. 그녀에겐 단지 조금 미안하단 생각뿐이다. 그러니까, 처음이라고 모두 아름다운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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