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있는 베짱이가 되기 위한 선언문
“저… 보기 중에 해당되는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요. ‘기타’에 체크하세요”
늘 그랬다. 이력서나 나를 드러내야 하는 서류에서 난 늘 ‘기타’로 분류되었다. 대학교 전공도 직업군도 경력도 사회에서 제시한 보기 중에서는 고를 수 없었다. 보기 없는 내 발자취가 보기 싫었다. 나를 평가하고(라고 쓰고 재단하고 라고 읽는다) 점수를 매기는 사람들도 내가 보기 싫었겠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을 좋아하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좋아했다.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깊은 사유를 하고 싶어 인문학도가 되었다. 혹자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자부했다.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어디서든지 사유하고, 사유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힘의 원천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줬다. 문과 출신은 상경계로 제한해 아예 입사지원서조차 넣어보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나마 학력란에 ‘기타’로 분류되더라도 입사지원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황송했다.
그렇게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것도 수십 번이었다. 행여나 면접의 기회를 주는 회사엔 ‘평생 충성을 다하겠노라’고 맹세하기도 했다. 면접장 문을 열자마자 면접관들 머리 위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회사 경영에 인문학적 사유를 가미하겠다는 CEO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내심 기대했지만 그 기대가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면접관들은 한참동안 서류를 훑어본 뒤 ‘우리회사 업무와 관련 없는 학문을 전공했는데 왜 지원했느냐’는 가시 돋힌 말과 ‘이 전공으로 우리회사 실무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는 근심 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소위 주류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난 프리랜서와 객원기자를 거쳐 주류 사회에 합류했다. 아니 합류한 줄 알았다. 하지만 ‘기타’라는 카테고리는 여전히 날 따라다녔다. 언론사 공채 출신도 아닌데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메인 카테고리 안에 있는 취재를 담당하지 않았기에 난 여전히 ‘기타’로 분류되었다. 이직을 할 때도, 은행 서류를 작성할 때도, 업계 실태 조사를 할 때도 해당 항목은 없었다. 하다 못해 결혼 생활도 기타로 분류되었다. 미혼, 자녀가 몇 명이냐는 항목은 있어도 딩크족이라는 항목은 없었다. 결혼을 하고 배우자를 두었지만 기혼도 미혼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였다.
이쯤되니 내 인생 자체가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 분명히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고 나름의 성과들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는, 사회가 재단하는 나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메인 카테고리에 넣어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제외시키기에도 애매한 존재. 난 그렇게 ‘기타’라는 공간 안에 갇혀버렸다. 나와 삶의 궤적이 확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와 함께 ‘기타’라는 공간 안에 욱여넣어졌다. 기타라는 공간은 난민수용소 같았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공간을 탈출해 ‘번듯한’ 항목으로 진입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발버둥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타(항목을 한 대) 치려 한다. 인생 전반전에 기타로 분류되었다면 후반전엔 기타를 연주할 것이다. 기타 선율처럼 아름다운 글과 말의 변주로 사람들과 교감할 것이다.
난 기타란에 스스로 나를 가두면서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 채 일만 하는 개미가 되지는 않겠다. 굳이 기타란에 체크를 해야 한다면 ‘기타를 연주하는 배짱 있는 베짱이’라고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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