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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T Jul 30. 2019

기자들은 왜 질문을 안 할까?

‘질문’ 닫히면 ‘지옥문’ 열릴 수도...

사진출처: EBS  다큐프라임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中


2010년 서울 G20 폐막기자회견장.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기자들에게 질문의 기회를 줬다. 그런데 수많은 기자들 가운데 질문하는 ‘한국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오바마 대통령은 통역을 해 주겠다는 권유와 함께 재차 질문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드는 사람은 없고, 침묵만이 기자회견장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누군가 일어났다. 중국 기자였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이 시간은 한국기자를 위한 시간이니 한국기자에게 우선권을 줘야한다”고 중국기자의 질문을 만류했다. 이에 중국기자는 한국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했고, 그 순간마저 침묵으로 일관한 한국기자들 덕분에(?) 질문권을 얻고 오바마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우리 기자들의 행태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질문하지 않는’ 한국 기자들의 모습이 꽤나 생소했나보다. 



기자(記者). 말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자들이 기사를 싣는 주요 플랫폼은 신문(新聞)이다. ‘새로운 것을 듣는다’는 의미다. 새로운 것을 듣고 기록을 하려면 물어봐야 한다. 기자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단어다. 그렇기에 질문은 기자들만의 특권이자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하는 기자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오바마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하지 않더라도, 공개 기자회견장과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활발히 질문하는 기자들의 모습은 찾기 힘든 게 사실이다. ‘사전 대본’ 논란이 있었던 몇몇 기자회견을 제외하고 말이다. 질의 응답 시간에 침묵이 흐르면 기자회견 주최측에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지며 어색한 침묵을 깨는 모습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기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일까?  



첫째,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기자 사회의 문화를 들 수 있다. 신속정확함 냉철함 정의로움 등 이른바 기자정신이 강조되다 보니 기자 사회도 대한민국의 여느 조직처럼 엄격 근엄 진지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엄근진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가벼움, 흥겨움, 개성, 튀는 말과 행동 등은 기자 사회에서 암암리에 금기시되는 감정이 되어버렸고, 더 나아가 하늘같은 선배들이 계신 공개석상에서의 질문도 튀는 행동이 되어버렸다. 



둘째, 질문해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인식이다.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기자회견 속성상 ‘내 질문은 곧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애써 질문을 던져도 해당 질문과 답변은 회견장에 있는 모두에게 공유가 된다. 나만의 개성 있는 질문, 혹은 참신한 내용을 이끌 수 있는 질문이 빛 바래지는 것이다. 실제로 1:1 인터뷰 기사에서 장문의 알찬 기사내용을 본 적도 많을 것이다. 그 알찬 질문은 바로 기자들이 던진 것이다. 다시 말해 기자들이 질문 자체를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타사 기자들이 내 질문을 듣고 그에 대한 답변을 가져가는 게 싫을 뿐. 



셋째, ‘메인 뉴스’ 무게 중심의 이동이다. ‘메인 뉴스’가 지면에서 온라인 모바일로 옮겨지면서 속보 경쟁은 한층 심화됐다. 이에 기자들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른 대답을 들을 시간에 차라리 타자를 치고 기사를 송고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기자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 역시 기사를 빨리 올리라며 실시간으로 쪼아 대는 데스크에게 시달리다 보니 질문을 포기하고 속보 기사 작성 러시에 동참한다. 속보보다는 기자회견 이면의 내용 취재나 깊이 있는 분석기사 작성이 훨씬 의미가 있다는 걸 기자들도 안다. 하지만 우리네 언론에서는 여전히 속보를 써서 포털 메인에 걸리는게 최고의 가치다. 



이외에도, 연예기자들의 경우 연예인의 가십과 사생활 다룬다는 점도 질문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신작 드라마나 영화 제작발표회장에서는 작품에 관련된 질문만 해달라며 사적인 질문을 원천 봉쇄하는 경우도 많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솔직히 대작도 아니고 이목을 끌 만한 내용도 아닌 경우 작품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공식석상에 나온, 평소 만나기 힘든 스타들에게 질문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정작 궁금해하는 걸 물어보지 못하게 하니 질문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상황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는 태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기자사회가 보수적이든, 튀는 것을 싫어하든 말든 기자회견장에서는 튀어야 하는 게 맞다. 그게 기자의 의무다. 또한,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하지만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이 질문을 풍성하게 해서 취재원으로부터 다양한 정보들을 뽑아내고, 각 매체별로 저마다의 관점을 가지고 다양한 기사를 생산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기자 사회 내부의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 오바마 해프닝이 일어난 뒤 한국 언론들은 '왜 한국기자들은 질문이 없는가?'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적어도 자기반성, 혹은 원인분석이라도 있었으면 덜 민망할 일. 하지만 그 기사를 쓰는 기자는 '한국 기자'가 아닌 듯 비판을 위한 셀프 비판을 감행했다.  



이미 대중들이 정보접근권은 전에 비해 몰라보게 향상되었다. 더 이상 남보다 먼저, 남보다 깊이 있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기자들만의 장점은 사라지고 있다. 기자회견이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기자회견 전문도 공개된다. 이제 기자들에게 남은 장점은 현장에서 취재원에게 직접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재원이 하는 말만 받아 적으며 스스로 ‘질문’을 닫아버린다면 기자 세계에는 ‘지옥문’이 열릴 지도 모른다. 



Copyright(C) Jul.2019 by Writer T.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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