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함의 고백
‘5년 후에 당신을 이끌어주는 귀인이 나타날 것이오.’
3년 전 나는 어느 뒤풀이 모임에서 사주를 잘 본다는 분을 만났다. 한두 잔씩 걸싸하게 취한 사람들은 사주를 보겠다며 흥분해 있었다. ‘사주?...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하며 쿨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찰나, 나의 사주가 궁금하다던 그분에게 뜻하지 않은 호출을 받았다. 그렇게 ‘물 없는 나무’의 사주를 가진 나의 인생이 펼쳐졌다. 그동안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위로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언제 쿨했냐는 듯 깊은 감격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해진 그분의 말씀. 5년 후에 나에게 귀인이 나타난다는.
그렇게 나의 귀인 찾기는 시작되었다. 세상사가 늘 호락호락하지 않듯,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귀인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남쪽에서 온다던가, 밤 12시 신발장을 넘어온다던가 (이건 도둑인데...),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서풍의 바람이 확 하고 불어 옷자락을 40도 각도로 넘기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던가... 거참, 귀인이 나타날 구체적 시간과 인상착의를 주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인생의 불확실성에 굴복하는 대신 나는 온 사방에 촉을 펼쳐 귀인을 찾기로 했다. 이 사람이 나의 귀인일까, 저 사람이 귀인일까. 학교 선배, 아는 언니, 교수님, 친구, 지인 등등.... 그들과 나누는 모든 대화 속에서 귀인이 소환됐다. 그들이 귀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 몇십 년이 지나 갑작스럽게 내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예상하지도 못한 일을 어느 날 함께 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느 날 홀연히 내 집 옆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에, 내가 몇 년간 찾아다니던 대답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져줬기 때문에 등등.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들과의 만남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사람은 똑똑하긴 한데 배려심이 없어.’
‘자기 자리도 잡지 못했는데 남의 귀인 노릇이라니...’.
‘저 사람은 행동보다 말이 앞서.
'도덕성이 없어' 등등...
<찐 귀인 찾기>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 된 나는 끊임없이 “제 점수는요...”를 외치고 있었다. 귀인이 되지 못할 이유는 그들이 귀인이 되어야 할 이유보다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렇다. 까다롭기 그지없다. 정답이 없는 귀인 찾기 문제에서 오롯이 정답을 이야기할 사람은 ‘나’뿐이라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도 나의 귀인 집착을 멈추지는 못했다. 어느덧 나의 귀인은 몽유도원도에 있을 법한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고, 배추도사, 무 도사의 차림으로 나를 가소로이 내려다보는 존재로까지 극상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귀인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
우선, 생각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인생은 아무리 내가 발버둥 쳐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때 아빠가 법대를 가라고 했는데, 그때 엄마가 교사가 되라고 했는데... 비정규직, 특수고용, 영세자영업자의 길을 걷고 나서야 내가 틀렸다는 걸 알고 섬찟 놀랬는지도 모른다. '왜 그들은 그때 더 나를 설득하지 않았나'하는 원망에 사로잡혀 과거에는 귀인이 없었다고 결론을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앞으로 만날 귀인의 이야기는 무조건 잘 듣겠다며, 반성문을 이제 갓 쓴 아이 마냥 순수한 바람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뒤돌아서면 바로 잊을 각오를 하면서 말이다.
더불어 나는 아마 누군가의 귀인이 되려고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나름의 무모한 욕심에 모두가 감동을 받을 것이라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내도 모자랄 지경인데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마음뿐이라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잘해봤자 소용없더라’하는 마음은 방어기제가 되어,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잘하지 않고 있는 나를 위로하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귀인이 나타나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며 선포해 주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복수심에 불타 ‘그래 귀인~ 너는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며 귀인에 대한 높은 도덕성과 성품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마 나의 귀인 찾기가 파랑새의 결말로 끝을 맺진 않겠지?' 하는 의혹을 애써 뿌리치며, 유효기간이 남은 나의 귀인 찾기는 아직 현재 진행 중이다. 얼토당토않게 쿨했던 나의 과거를 반성하며, 까다롭기 그지없는 기준을 넘어 귀인이 되었을 미래의 누군가에게 이 글을 빌려 미리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귀인에 최종 합격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