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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매일 단상

김태희를 만났다

by 김나물

7년 전 그날 나는 김태희를 만났다.


그때 나는 어딘가에 단단히 홀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한국행에, 시집살이에, 급물살처럼 펼쳐지는 인생의 방향 전환에 나는 노를 어디로 저을 줄 몰라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손바닥만큼의 공간도 오롯이 나를 위한 곳이 없었고, 나의 희생을 전제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한 다른 이들의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잠시 밖을 나섰다가 돌아올 즈음이면 도살장에 끌려가듯 집으로 들어갔다. 지옥문이 바로 여기구나. 한 순간에 나는 돌아갈 곳 없는 거리의 방랑자가 되었다. 답답하고,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벗어날 거야"

탈출을 결심했다.


우선 일을 해야 했다. 30대 아줌마를 어디서 써주겠냐는 절친의 쓰디쓴 조언에도 불구하고 나는 홀린 듯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탈출하고픈 욕망은 놀랍게도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일단 아무 데다 넣고 보자. 어딘가는 얻어걸리겠지.’ 하루에 10통 이력서 보내기를 목표로 했다. 그렇게 100통쯤 보내고, 10군데쯤 면접을 보러 다녔다. 아이들 데리러 학교 가는 도중 걸려온 면접 전화에 민낯에 달려 나가기도 했고, 어느 돈 많은 부잣집 아들로 보이는 내 나이 또래 사장님의 사무실에도 앉아 봤으며, 원하면 바로 팀장을 시켜주겠다는 근본도 없는 회사 사무실에도 앉아봤다. 면접이 끝나면 경쟁자이자, 동지인 이들과 수줍게 인사를 나누던 기억도 생생하다. 서로의 깊은 인생사를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말이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구직생활에 지쳐있을 즈음, 마침 어느 공채 모집이 떴고 나는 운이 좋게도 1차 서류전형과 2차 실기고사를 통과했다. “이제야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구나.” 나의 자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실기고사 책상에 붙어있던 다른 응시자의 생년월일 앞자리가 떠올랐다. 나와는 다른 숫자로 시작하는 앞번호를 가진 이들 틈에서 뭔가를 해낸 내가 뿌듯했다. “드디어 탈출이 문 앞이다!” 3차 면접을 앞두고 흥분과 긴장에 싸인 나를 두고 친한 동생이 조언을 했다.


언니~ 안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
그건 언니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그곳에 김태희가 있었을 뿐이야.


인생이 그런 거란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어딘가 모두의 노력과 간절함을 초월하며 외모, 능력, 스펙을 갖춘 누군가는 항상 존재한단다. 애초에 승산 없는 싸움에 쪼가리라도 남은 자존감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 조언의 요지였다. 아등바등 기를 쓰고 탈출하려는 나이 든 언니가 가여웠나 보다. 그렇게 나는 3차 면접을 위해 면접 시나리오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김태희의 존재를 망각한 채.


드디어 3차 면접 날. 나를 포함해 4명이 면접장에 불려 갔다.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이었다. 혹시라도 외운 것을 잊을까 되뇌고 또 되뇌었다.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 가운데 무거운 긴장감이 돌았다. 그때 훤칠한 외모의 20대 남성이 정적을 깨고 박력 있게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 태! 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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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김태희를 만났다. 20대의 건강한 젊음과 충만한 자신감을 과시하던 김태희는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기를 쓰고 탈출하려는 나의 욕망을 비웃는 듯했다. 현실에는 넘을 수 없는 공고한 벽이 있으니 감히 쳐다볼 생각도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너의 세상은 거기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될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억울하지도 않은지) 나는 후배의 말이 떠올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김태희의 우렁찬 외침 속에 어느덧 나의 신파는 코미디가 되었다. 미친 듯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개평이라도 받은 듯 한참을 크게 웃었다. 아는 동생의 조언은 현실이 되어 나는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얼마 후 나는 어느 작은 단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탈출의 문이 쉽게 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그럭저럭 어찌어찌 또 살아갔다. 지옥문이 평범한 문이 되고, 설거지를 하며 내뱉는 한숨이 익숙해지고, 걸어오는 말에 아무 대답하지 않는 게 자연스러워질 무렵. 탈출의 기회는 느닷없이 우연스럽고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인생의 방향키를 잡고 어디로 노를 저을지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김태희를 만났던 그때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면서. 그날 김태희 씨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수줍게 건네본다.


"김태희 씨,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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