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VACILANDO[바실란도] : 어디로 가는지보다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한 여행을 하다
스페인어 'VACILANDO'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뜻은 위와 같지요. 마침 여행을 계획하던 중에 이 단어를 알게 된 것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굳이 의역을 하자면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한 여행일 텐데, 나의 여행이 그렇다고 스스로 세뇌시키던 중이었으니 말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목적)보다 무엇을 하는지(과정)가 더 중요한 여행. 별일 없다면 다음 주(2016년 4월 27일)부터 시작하게 될 내 도보여행이 그랬습니다.
몇몇 지인들에게 저의 여행 계획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왜?"냐는 단말마의 반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짧은 한 음절에 담긴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런 짓을 하는 목적이 뭐냐?' 혹은 '뭐하러 그런 고된 짓을 하냐?'. 그리고 그 질문에 뭔가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으려 노력하는 나 자신을, 전지적 작가 시점의 또 다른 내가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는 혀를 쯧쯧, 찼던 것 같습니다. "왜"냐고 묻는 이들을 설득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내가 다짐한 여행이 얼마나 의미 있고, 또 가치 있는 일인지 납득시키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누구에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해 가는 거라면 그게 과연 여행일까요? 그건 여행이라기보단 수행이나 훈련일 것입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저는, 그 단순한 사실을 잊은 스스로를 보며 혀를 찬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광객의 사전에 건너감이란 없다. 관광객에게는 모든 곳이 여기요 지금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길 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길은 볼거리가 없는 공허한 통로로 전락하고 만다. - 한병철, 시간의 향기 中
관광객과 여행자 둘에게 똑같은 지도를 준다면 어떨까요? 관광객의 지도엔 점이 남을 것이고, 여행자의 지도엔 선이 남을 것입니다. 관광객에게 중요한 건 관광지지만, 여행자에게 중요한 건 여정 그 자체니 말입니다. 점과 점 사이에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관광객은 교통수단을 답으로 내놓을 것이고, 여행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계절과 날씨, 지나친 장소들의 풍경과 분위기, 그리고 만난 사람들의 모습들 따위를 말입니다. 길가의 꽃과 나무, 강물의 색, 또 순간 들었던 음악과 그 색들이 얼마나 잘 어우러졌는지를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길 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수도 없이 많을 테니까요. 저는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점과 점 사이에 선을 긋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선을 긋기에 걷기만큼 쉽고 간단한 방법은 없을 것이고 말입니다.
하여, 누군가 다시 내게 "왜?"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려 합니다. "선을 긋고 싶다"고. 뭔 개똥 같은 소리냐는 표정이 눈에 선하지만, 그 답이라면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도 혀를 차진 않을 것 같습니다. 말했듯,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해 가는 여행이 아니니 말입니다.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 여행이고 말이죠. 그냥 여행자가 되고 싶은, 나다운 여행을 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자 설레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으로 저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챙긴 물품 : 트래킹화, 언더레이어(운동할 때 입는 쫄쫄이) 상하의 두 벌, 스포츠웨어(운동복) 상하의 두 벌, 평상복(반팔, 반바지) 상하의 한 벌, 속옷 두 벌, 등산용 양말 5켤레, 바람막이, 모자, 마스크, 세면도구, 스포츠 타월 2개, 손전등, 지도, 노트, 배낭 (+ 노트북, 녹음기, 충전기, 에그)
덧) 저의 여행 매일매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도 접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팟캐스트 방송이었습니다. 때문에 저 괄호 안의 물품이 추가된 것이고요(배낭 무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비슷한 여행을 계획 중이지만 팟캐스트를 할 생각이 없다면 제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면, 이 글의 제목인 <찌질하게 걷기>로 팟캐스트 검색을 하시면 청취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을 남겼지만, 역시 글만큼 지속성 있는 기록은 없기에 이 브런치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