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차(수원 - 평택)
눈을 떴다. 아니 눈을 감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뇌리를 때렸다. 거기에는 세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째, 어제보다 많이 걸어야 했다. 수원의 남쪽으로 대충 알만 한 도시는 오산, 그 다음 평택이었다. 하지만 어제 걸었던 거리(20km 후반 ~ 30km)를 걷는다고 하면 오산과 평택 사이에 애매하게 걸치게 된다. 대충 지도로 보니, 그 사이엔 거의 공장지대여서 뭐가 없었다. 그렇다고 오산에서 멈추자니 너무 짧은 거리였다. 잠정적으로 평택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째, 잠을 거의 못 잤다. 어제의 걸음은 나에게 정말 오랜만의 격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몸이 몹시 피곤하니 잠도 잘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은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정말 분노가 치미는 상황이 계속됐다. 거기에 찜질방이라 그런지 더웠다. 영하 10도로 유지되는 남극방이 없었더라면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피곤한 상황에서 잠을 채 세 시간도 자지 못했다. 마지막 셋째, 다리가 많이 아프다. 격한 운동을 하면 그 다음날 고생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 전부터 나름 준비운동을 한다고 했는데, 역시 턱없이 부족했나 보다. 그냥 맨몸으로 걸어도 정상적인 걸음걸이로 걷기 어려울 정도였다. 찜질방을 함께 해 준 동생에게 못해도 다섯 번은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형, 왜 그렇게 걸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찜질방을 나섰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당장 쓰러질 지경은 아니니 걷는 수밖에. 참고로 말하면 여기서 우리 집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었다. 광역버스도 아니고 시내버스로 말이다. 어제 그렇게 걸은 게 겨우 1,300원어치(카드로 하면 1,250원)였다고 생각하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환승이 필요한 거리 정도는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걷기 시작하니 이내 걸음걸이는 봐줄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맥도날드에서 맥모닝 세트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30분 정도 동생과 함께 걸은 후 헤어졌다. 다시 혼자가 되었고, 출근하는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묵묵히 걸었다. 내가 걸은 길이 유독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성과 동탄은 정말 삭막했다. 커다란 컨테이너를 세워놓은 것 같은 멋대가리 없는 공장지대 아니면 황량한 공사판이 내가 두 도시에서 본 전부였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오산 시내에 접어들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대형마트가 보였고 이끌리듯 들어갔다. 녹음기에 들어가는 여분의 건전지를 챙기지 못해 그거나 좀 살까 하고 들어간 마트를 괜히 한 두 바퀴 돌게 되었다. 그거 말고는 살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 푸드코트가 눈에 띄었고, 마침 점심 때도 됐고 해서 간단하게 옛날식 도시락으로 끼니도 해결했다. 이래저래 마트는 참 좋구나, 라는 전혀 여행자스럽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다리는 계속 아팠다. 쓸데없이 마트는 왜 돌아서,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어쩌랴. 마트는 정말 즐거운 공간인 것을. 푸드코트 정수기에서 물도 채우고, 화장실도 들른 후 다시 출발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산의 경계를 지나, 평택에 진입했다. 물론 목표한 평택 시내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도로를 지나다 보면 '구부러진 차 펴드립니다.'라고 써놓은 봉고차를 본 경험이 한 번은 있을 거다. 하지만 거기에 멈춰서 정말로 구부러진 차를 펴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누가 저런 서비스를 이용할까, 싶은 그 '구부러진 차 펴드립니다.'라고 쓰인 봉고차가 저만치 앞에 보였다. 봉고 옆 그늘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앉은 방향도 마침 내 쪽을 향해있었고, 그래서인지 내 걸음걸음을 계속 바라보고 계셨다. 너무 쳐다보시기에 그냥 지나가기는 민망해 살짝 목례를 하니, 기다렸다는 듯 쉬었다 가라며 옆의 빈 의자를 툭툭 치신다. 구부러진 차를 펴본 적이 없어서인지 썩 내키진 않았지만, 그래도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다 싶어 잠깐 앉아보기로 한다. 그러자 이 아저씨 입을 여시는데, 그 첫마디가 내 귀를 번뜩 뜨이게 했다. "어제도 비슷한 사람 한 명이 배낭 메고 지나갔는데, 잘 생겼더라고."
여행을 결심하고 그런 상상을 했다. 이런 여행을 나만 하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우연히 길을 걷다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참 재밌겠다고. 물론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고 실제로도 그런 일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봉고 아저씨를 통해 나랑 비슷한 여행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하루 차이로 만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쉽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저씨의 말씀 중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잘 생겼다니. 그렇다면 나는 어떻단 말인가? 도저히 묻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물어보고야 말았다. 그러자 아저씨 조금 당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윤곽이 뚜렷해서 잘 생겼지만 금방 질리는 스타일이라 나는 그런 스타일은 별로고, 그쪽처럼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스타일이 좋더라고." 그다음에도 괜히 찔리셨는지 말씀이 길어지셨다. 그 중언부언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조금 서운해졌지만, 덕분에 유쾌하게 쉬어갈 수 있었으니 봐드리기로 한다. 이 글을 아저씨가 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팟캐스트로 아저씨의 변명을 녹음해 올려두었습니다. 궁금하시면 팟캐스트 <찌질하게 걷기> 2회를 청취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저씨와 헤어지고 평택 시내를 향해 계속 걸었다. 오전부터 아팠던 다리의 고통이 크레센도로 점점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아킬레스 건 부근과 무릎 뒤 오금 부위가 몹시 아팠다. 이동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거의 걸음마 수준으로 걷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수십 번이고 시내까지만 버스를 탈까, 하는 유혹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이틀 만에 그렇게 타협을 하는 것은 내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부끄러울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발을 끌다시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평택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의 한 모텔에 짐을 풀고, 약국에서 잔뜩 산 파스를 다리에 덕지덕지 붙이고, 김밥집에서 사 온 꼬마김밥을 먹었다. 그리고 어제와는 달리 일말의 지체도 없이 숙면에 빠져들었다. 오늘 온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이거다. 아무리 느려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2016년 4월 28일 목요일(2일 차)
여정 : 경기도 수원 - 경기도 평택
총 거리 : 35.77km(누적거리 : 64.31km)
소요 비용 : 54,800원(모텔 35,000원 + 아침 7,300원 + 점심 5,500원 + 저녁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