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천안 - 세종)
첫째 날에도 썼듯, 이 여행에서 가장 믿지 못할 건 내 몸뚱이다. 인내심이라곤 없는데다가 힘든 일을 멀리하며 살아온 인간인지라 여행의 끝을 볼 수 있을지 가장 미심쩍었던 건 나 자신이었다. 작심삼일이랬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적지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사히 4일 째를 걷기 시작하며, 비로소 조금은 자신 있게 목적지를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여행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적지는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1차 목적지는 전라남도 나주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첫 사회생활을 한 곳이다. 살아생전 제주도 빼고는 남쪽으로 갈 일이 거의 없었던 내가 나주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가히 국가적이다. 어쩌다 보니 공기업에 들어가게 됐는데, 국가균형발전에 입각한 공기관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내가 입사한 회사는 나주혁신도시로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전라남도 땅에 터를 잡고 잠시나마 살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주에는 재워주고 먹여줄 친구들이 좀 있다. 목적지를 나주로 잡은 표면적 이유다. 심층적 이유가 따로 있기는 하다. 별로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엔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 썼던 이야기와 비슷한데, 집에서 나주까지 선을 그어보고 싶었다. 일하는 동안 거의 매주 주말이면 꼬박 왕복 7~8시간을 감수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는 곳에서 주말을 보내기가 서울을 오가는 피곤함보다 훨씬 싫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오갔던 집과 나주지만, 그 사이가 뭐가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지난 2년 간 내 삶의 지도에는 오직 집과 나주에 점 두 개만 찍혀있던 셈이다. 그 사이를 선으로 이어 보고 싶었다. 내 두 발로 직접 걸으며, 내가 지겹도록 오갔던 두 곳 사이가 이렇구나, 보고 느끼고 싶었다.
어쨌거나 작심삼일은 넘겼다는 뿌듯함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종특별자치시에 접어들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세종시에 거주하는 친구 집이다. 대학 친구지만, 나주로 갔던 나와 비슷하게 난데없이 타지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다. 마침 토요일이고, 또 오늘이 친구의 음력 생일이라기에 이래저래 알맞은 방문이 될 것 같다고 혼자 생각했다. 이 여행이 딱 언제, 어디까지 맞춰서 가야 하는 여행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맞춰 도착해야겠다 싶었다. 갈 길이 멀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다리도 작심삼일이었는지, 어제보단 덜 아팠다. 대신 날이 꽤 더웠다. 땀을 쪽 빼며 걸으니 뭔가 시원한 것이 먹고 싶어 열무국수라고 쓰인 음식점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장님 말씀하시길, 열무국수는 내일모레부터 된단다. 밖에 쓰여있는 것 보고 왔다고 하니, 계절메뉴로 이제 시작하려고 오늘 현수막을 거셨단다. 역시 안될 놈은 뭘 해도 안된다. 별수 없이 백반을 먹었다.
좋아하는 영화 중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라는 작품이 있다. 부모의 이혼으로 서로 떨어져 사는 형제가 소원을 빌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일종의 로드무비인데, 설정이 재미있다. 열차가 서로 교차하는 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거다. 오늘 길을 걷다 보니 계속 철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종종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마치 최초의 영화를 찍은 뤼미에르 형제마냥 동영상을 찍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지나가는 기차를 찍는 중에 갑자기 반대편에서도 기차가 지나갔다. 멍하니 카메라를 보다가 문득 앞서 말한 영화 생각이 나서 소원을 빌어보았다. 다급한 상황이라 다른 소원을 떠올리진 못했고, 그저 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다행히 큰일 없이 여행을 마치고 이 글을 쓰고 있으니 소원이 잘 이뤄진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구나 싶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진입해서도 쭉 농촌만 지났다. 중간에 갑자기 충청북도 청주시라고 알리는 간판이 나와 놀라긴 했지만(아마 살짝 충북의 경계에 들어갔다 나왔다 보다), 특별자치시라는 세련된 이름이 붙기에는 무척이나 시골인 세종시를 한나절 가까이 걸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저 멀리 미래도시 같은 풍광이 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정부청사에 도착한 것이다. 미래도시에 진입해 친구에게 연락했다. 친구는 내가 그저 놀러 온 거라 생각할 뿐, 걸어서 온 줄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내 행색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친구는 궁금하다는 듯 이런 망발을 했다. "분당에서 하루 만에 온 거야?", "하루에 150km 정도 걸을 수 있는 거 아냐?" 그러고는 밥을 사 줄 테니 나가서 먹자고 했다. 하지만 오늘 겨우 40km를 걸은 난 한 발짝도 더 걷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마침 토요일, <무한도전>도 봐야 하는 날이다. <무한도전>을 보며 치킨을 시켜먹었다. 행복이 별게 아니구나 싶었다. 배부르고 등따신 토요일 저녁을 만끽하며, 간만에 외롭지 않은 밤을 보냈다. 팟캐스트에도 출연해 개소리 유쾌한 이야기를 많이 해준 친구에게 이 글을 빌려 고맙다고 전해 본다. 침대까지 양보해주려는 친구를 만류하고, 바닥에 펴준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 친구의 코골이를 자장가 삼아.
2016년 4월 30일 토요일(4일 차)
여정 : 충청남도 천안 - 세종특별자치시
총 거리 : 40.47km(누적거리 : 138.09km)
소요 비용 : 5,000원(점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