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의 밤

5일 차(세종 - 대전)

by 잘코사니
돈이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저 최대한 느리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게 찌질해보일지라도 말입니다.


팟캐스트 <찌질하게 걷기> 이미지


부끄럽지만, 이 걷기 여행을 기록한 팟캐스트 <찌질하게 걷기>의 오프닝은 이렇게 시작한다. 부끄러움에도 오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는, 저 첫 문장 때문이다. 내가 도보여행을 결심한 이유가 돈을 아끼는 여행을 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다. 돈을 아끼고 싶었다면 여행을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으리라. 사치까지는 아니어도 쓸 때는 쓰고, 억지로 아끼지 말자는 것이 내 마음가짐이었다. 그 마음으로 오늘의 목적지를 결정했다. 오늘은 대전 유성으로 향한다. 정확히는 유성호텔이다. 이유는 다들 눈치를 채셨으리라 생각한다. '유성'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렇다. 온천이다. 유성호텔 대온천탕이 유명하다고 (블로거들이) 하기에, 나 스스로에게 격려의 선물로 호텔방과 온천욕을 주기로 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놓인 선물에 설렌 아이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침을 먹고 가라는 친구를 따라나섰다. 강제이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의 부작용일까. 내가 있던 나주도 그랬지만, 여기 세종도 주말이면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황량해지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사람이 없으니 음식점도 대부분 문을 열지 않았고, 거의 유일한 선택지인 롯데리아에 갔다. 여기서 다시 유일하게 좋아하는 새우버거를 먹고, 친구와 작별했다. 태양이 작열하는 미래도시를 지나 대전으로 향한다. 지도 상으로 본 세종 - 대전 구간은 완전 쌩 차도였다. 그리고 이틀 전부터의 경험으로 차도에는 인도가 없으리라 가정하고 다닌다. 오늘도 갓길 신세를 각오하고 걷고 있는데, 옴마! 이 훌륭한 자전거도로는 무엇이란 말인가. 왕복 8차선 도로 한가운데 쭉 뻗은 자전거도로에 나는 감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심지어 도로 위로 펼쳐진 태양광 발전판은 훌륭한 그늘까지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갓길로 다닐 때처럼 마음 졸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감동의 자전거도로


아쉽게도 태양광 발전판은 중간에 사라졌지만, 곧게 뻗은 자전거도로는 대전까지 나를 인도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유성을 목적지로 잡으며 짧아진 거리를 순식간에 걸어 도착했다. 물론 정말 순식간은 아니고, 오후 두 시가 좀 넘어서 도착했다. 걷는 동안 수원 영통의 동생(1일 차에 등장)에게 연락을 해봤다. 어차피 호텔은 2인 숙박이고, 수원에서 대전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시간 되면 내려와서 온천놀이도 하고 하루 놀다 가라고 말이다. 생각 좀 해보겠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온다는 건지 만다는 건지 통 연락이 없었다. 유성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다시 연락해보니, 예상외의 답을 내놓는다. 이왕 내려가는 김에 며칠 같이 걸을 요량으로 짐을 싸고 있단다. 동생이 올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니 온천을 하고 오기로 했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꽤 많은 유성호텔 대온천탕은, 조금 과장하면 고대 로마의 목욕탕처럼 웅장했고 탕의 종류도 엄청 많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순간, 코피가 터져나왔다. 역시 이 싸구려 몸뚱이는 고급진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나 보다. 그래도 몸이 확실히 풀리는 게 느껴지는 것이, 이제 정말 아저씨가 다 되었구나 싶다.




코피로 빠진 수분을 온천물로 채우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으니 곧 민호(앞으로 계속 등장할 예정이니 이름을 밝히도록 한다)가 도착했다. 배낭을 메고 온 모습을 보니, 내가 이 불쌍한 영혼을 엄한 짓으로 끌어들였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일랑 저녁식사 앞에서 금세 사라졌다. 대전이 고향인 친구가 추천해준 대선칼국수에 가서 두부두루치기를 먹었다. 두부를 두루치기로 먹는다니 신기했지만, 매콤한 그 맛에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칼국수 사리를 추가해 먹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난데없이 맛집 블로그 같지만, 어쨌든 저녁을 맛있게 먹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민호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온 거니?" 그러자 민호가 답한다. "그냥요." 그 대답을 듣자, 문득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구나 싶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냐고 물었을 때가 데자뷰처럼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걷고 싶다는데 이유가 있을까. 내일부터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 그냥 걸어보련다.


온천의 밤




2016년 5월 1일 일요일(5일 차)
여정 : 세종특별자치시 - 대전 유성구
총 거리 : 20.81km(누적거리 : 158.90km)
소요 비용 : 76,000원(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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