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이제 더 이상 걷지 않는다.
돌계단 위에 앉아 라디오를 듣지 않아도 되고
한쪽 호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어디서 끝내야 할지 모르는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따뜻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어디든 편하게 갈 수도 있다.
서로를 잊은 채 누군가와 만들어온 모든 시간을 부정하듯 맹렬히 달려든다.
우리의 시간은 흐름 없이 멈춘다.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배운 것이 많으니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해보겠노라 여러 번 다짐했다.
너는 어쩌면 나보다 더 할지도.
나는 알 길이 없다.
네가 지나온 그 시간의 농도를.
네가 겪은 아픔의 밀도를.
다만 하얗게 새어버린 숱 많은 머리카락을 헤집을 때.
혼자 거울을 보며 검은 염색약을 칠하는 뒷모습이 쓸쓸하다.라고 생각할 뿐.
내 무릎을 베고 TV를 보던
네 머리가 반백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 날
너는 변명이라도 하듯 엉거주춤 일어나 설명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프랑스 대혁명 때 머리가 하얗게 셌다며. 나도 이혼하고 나니 이렇게 되어있더라. 나한테는 이혼이 대혁명 같은 거였나 보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 일이
때로 눈앞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비운의 왕비가 된 너의 뒷 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와줄까?”
“아니. 뭐 하러. 벌써 네 나이에 배우자 머리 염색시킬 수는 없어.”
너는 나지막이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말을 하고 싶었다.
“탈색을 해 버리자. 예전에 어떤 영화배우도 그렇게 나왔잖아.”
“그럼 또 반은 검은 머리가 자라서 이제 매달 뿌리 탈색을 해야할 걸. 내 두피를 다 태워버릴 셈이야?.”
너는 고개를 숙인채 윗머리를 보며 눈을 한껏 치켜뜨고 반쯤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미안하다. 널 다시 만날 줄 알았으면 스트레스 좀 덜 받을걸.”
그때 나는.
웃었던 것 같기도, 좀 슬펐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과연 너의 사연들을 다 끌어안을 수 있나.
나에게 전하지 못할 그 이야기를 과연 품을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는 뒤돌아 보며 눈을 찡긋했다.
“괜찮아.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도 돼. 너는 생각이 많아서 늘 어려운 거야.”
가끔 너는 내 안에 들어왔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면 나는 허둥대며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던졌다.
"네 흰머리카락, 안아. 나를. 전부.“
사용법에 정해진 시간이 지난 후에
새카만 머리를 한 네가 나를 안았다.
먼 과거로 돌아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너의 머리칼은 내 안에서 형체 없는 희열로 타올랐다.
“사랑해.”
대개 인간은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언어로 끝을 맺는다.
말이 만든 질서 안에 시간과 의식을 가둔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