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 없는 청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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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산다는 건 포기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인 거 같아.”


청첩장을 건네고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던 정민이 입을 뗀다.


“무슨 말이야. 포기는 김장할 때나 쓰는 말이야!”

나는 해묵은 농담을 던지며 애써 웃는다.

정민이의 텅 빈 웃음이 따라온다.


그녀의 언어가 부담스럽다.

나도 아는 이야기. 누구나 느끼며 살아가는 감정들이

그녀의 입에서는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처럼 무겁고 또 공허하다.


그녀는 하얗고 가느다란 검지로 플라스틱 물병 아래 맺힌 물기를 쓰다듬는다.


“여기 비싸다던데. 밥 맛있겠다. 뭐 받고 싶은 선물 없어?? 필요한 거. 냉장고 할까? 애들이랑 같이하면 좋을 거 같아. 아니면 세탁기? 요즘 스타일러도 많이들 한 대.”

나는 재빠르게 선물 공세를 퍼붓는다.

정민은 희미하게 웃는다.

“아무거나. 결혼할 거야. 걱정하지 마.”

“응? 응. 그래.”


나는 그녀의 연애를 직접 본 적이 별로 없다.

대학 때 이후로 그녀의 연애는 늘 비밀스러웠다.

괜찮아. 착해. 잘해줘. 이 정도로 표현되는 그녀의 남자들.

뭔가 중요한 게 하나 빠진 듯한 그 연애 안에서 그녀는 뭔가를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그 하나를 포기하려는 참인듯하다.


“그래. 원래 그런 거래. 죽고 못 사는 사랑. 그거랑 결혼이랑 애초에 등가교환이 안 되는 거야. 결혼은 적합한 배우자를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종족을 번식하기 위한 의식 아닐까. 아무나랑 결합해서 내 유전자를 대물림할 수는 없잖아.”

내 말이 많아진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나는 줄과 줄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을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고 적절한 대사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인가.

맥락에 없는 축언을 툭 떨어뜨린다.


“너가 행복하면 좋겠다.”


정민의 눈가가 조금 붉다.

말이 어떤 결과를 위한 시작이라면

나는 늘 의도한 결과를 이끌지 못하는 서툰 기술자 같다.



“행복하면 좋겠다.”

정확하게 너는 그렇게 말했다.

8년 전. 지하 호프집에서.

아버지에 관한 나의 원망과 갈망에 관해 늘어놓자

너는 네 앞에 놓인 잔에 소주를 따르며 너를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모를 바람을 말했다.


우리는 둘 다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를 둔 자녀였다.

너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나의 아버지는 회사원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는 외로웠다.

부유하게 자란 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르바이트 시장에 뛰어든 이야기와

평범하게 자란 내가

아버지의 외도로 거센 사춘기를 겪은 사연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안정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 부모를 보고 싶은 마음.

조건 없는 애정을 주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싶은 바람.

우리는 둘다 결핍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사연에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결여되어

너의 극한 상황 앞에서 힘을 잃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걸까. 생각하던 나에게 네가 말했다.


“모든 고통은 각자의 값이 있어. 개인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남이 가늠하지 못해.”

그 말이 복잡하고 아름다워 잠깐 숨을 참았다.


우리는 소시지와 야채볶음을 앞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주머니에 천 원짜리 지폐가 몇 개 있었고

벽에는 메뉴판이 붙어있었다.


“너는 네 값의 고통을 느끼는 거야. 그 고통이 하찮다고 폄하하지 마.”

아마도 나는 놀란 표정이었을 거다.


그날부터였을까.

나는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썼다

나를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너를 향해.

내 안에 부끄러운 감정들을 고백하는 일기를.

내 일상의 상처와 감정들은

곁에 없는 너를 향한 노래가 되었다.


기억들을 곱게 접어 넣으며 정민에게 말한다.

“행복하자.”


정민은 이제 원래의 표정을 찾는다.

“알아. 행복할 거야.”

그녀의 다짐이 나를 위한 위로처럼 들린다.


테이블 위에 놓인 청첩장이

체온 없이, 그저 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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