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민은 사랑을 주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늘 남자들의 구애를 받았다.
그녀가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도서관에 돌아오면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메모가 놓여있곤 했다.
나는 내심 그런 정민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유독 자신에게 관심이 없던 남자를 골랐다.
그녀를 매일 같이 울렸던, 목소리가 멋진 그 선배는
내 알기로 도도한 정민의 사랑을 참 많이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떼쓰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친 듯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정민은 그날, 선배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던 날 이후로
한 번도 연애 상대에게 떼쓰지 않았다.
이후로 그녀의 연애는 늘 섭씨 20도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살기 좋은 상태.
그래서 괜히 센티하고 우울한 날씨.
버스 안에서 다시 청첩장을 꺼내어 본다.
옅은 펄이 자잘하게 내려앉은 하얀 청첩장은 여전히 온도가 없다.
나의 연애는 몇 도였나.
단언한다.
너와의 연애는 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온도까지 도달했었다.
내 연애들의 온도는 다양했고,
또 때에 따라 진폭이 있었지만.
너와의 관계에서 나의 온도는 적어도 내 체온을 웃돌았다.
나는 그 뜨거운 열병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졌다.
너의 결혼생활도 어쩌면 그러한 뜨거움이 식어가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너는 네 말대로 ‘늘 사랑하게 할 수 있는 남자’여서.
결혼도 높은 온도가 만들어낸 작품이었을 테지.
젊은 날이었고, 사랑을 했으니
그녀는 너의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 테지.
너의 변은 아팠다.
“나를 증오했었어.”
왜.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뒤따르는 네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난 무서웠어.”
증오에 대한 결과물이 두려움이라니.
“아이는?”
“엄마가 데리고 갔어.”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너는 잠깐 쉬고 덧붙였다.
“하지만 무서워.”
너를 두려움에 떨게 한 그녀의 증오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 무겁고 칙칙한 연애의 끝은
상대에 대한 경멸과 분노였다.
증오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니까.
아마도 그녀는 너를 많이 사랑했을 거라 짐작했다.
“괜찮아.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만나.”
창밖으로 빗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우리는 작은 침대에 마주 누워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도 나를 미워하게 될까?”
네 질문이 아파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농담을 던졌다.
“하는 거 봐서?”
네가 힘 없이 읏었다.
“사랑이 식더라도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눈이 길 잃은 고양이처럼 처량했다.
그 모습이 나를 오히려 단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네 전처로 인한 상처까지 돌봐줄 만큼 너그럽지 않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래서 너를 다시 만나는 거야.
이런 감정이 증오나 미움으로 바뀐다는 건 타당하지 않아. 내가 선택한 거니까.”
나는 네 슬픔을 걷어내듯 또박또박 말했다.
네 뜨거운 연애의 끝이 증오와 두려움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것이 아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내가 없었다는 것이
나를 두 번 아프게 했다.
어젯밤 너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정민의 청첩장을 다시 가방 안에 넣는다.
그래. 어쩌면 미지근한 게 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