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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오늘은 엄마가 하라고 한 일을 해야 해.
아니야. 한 시간 안에 마쳐. 나중에 봐.”
주말 아침이면 너를 만나기에 앞서
엄마의 숙제를 한다.
지난 1년간, 내가 너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졌음을 말하지 않아도
누구든 내가 평범한 상태가 아님을 눈치챘을 것이다.
상기된 표정과 늦어지는 귀가 시간.
평소보다 한두 음정 높아진 달 띤 목소리.
나는 평소보다 과하게 밝았고 늘 흥분해 있었다.
스물세 살의 내가 되감기 버튼으로 재등장한 듯.
나는 철모르고 설렜다.
그럴 수록 엄마는 초조해 보였다.
엄마의 메모장에 전화번호들이 늘어갔다.
다양한 숫자들의 조합만큼 그들의 이력과 외모는 다채로웠다.
나는 오늘도 엄마의 새로운 전화번호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한다.
오후 2시
저녁을 먹지 않아도 되는 시간.
서른 번이 넘는 맞선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다.
두 번은 만나지 않을 남자들에게 커피값 정도만 부담시킬 수 있는.
때로 내가 지불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금액의 시간이다.
오늘 이 전화번호는 유난히 시선이 곧고 안정되다.
다음 주 다른 소개팅에 나가면 분명 애프터 신청에 성공할 남자다.
앞에 앉아 있는 저 남자가
나를 기다리면서 읽고 있던 책의 표지에는 1Q84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어젯밤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다가 늦게 잤다며
피부가 좀 까칠해보이지 않느냐고 물으며 웃는다.
우리는 제법 즐겁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코엔 형제의 작품들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여유롭고 반듯해 보이는 남자는
다음 달에 있을 마룬파이브의 내한공연에 함께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하루키와 코엔 형제, 그리고 마룬파이브는 뭔가 이질적이라,
동시대의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급하게 공부하고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태도와 분위기가 조급하거나 허둥대지 않아
어쩌면 이 남자가 정말 지난밤에 그 영화를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초 내가 계획한 시간을 30분 넘기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많이 바쁘시군요. 미안합니다. 바쁘신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잡았을 텐데요.“
정중하고 당당한 말투에 기가 죽는다.
”제가 죄송하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내 몸에 부딪혀 둥근 테이블이 조금 흔들린다.
커피를 담은 둥근 잔과 잔을 받치는 물결치는 작은 접시가 서로 부딪히며 소음을 낸다.
힘이 빠진다.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집어 들고 몸을 돌린다.
뭐라 이름해야 할까. 이런 형태의 감정은.
황급히 호텔 문을 열고 나온다.
햇살이 남은 늦은 가을의 풍경.
겨울이 오는 냄새.
그리고 저 길 어딘가에 네가 있다.
아무렇지 않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