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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응. 오늘 선 본 사람”
“......”
“미안해. 이 답장하고 나면 다시는 연락 안 올 거야. 잠시만.”
급하게 메시지를 쓰느라 네 표정을 볼 수가 없다.
“뭐 하는 사람인데.”
“응?? 뭐.... 사업한대. 잠시만. 이것만 보내고.”
급하게 손가락으로 휴대전화를 터치한다.
“계속 만나보지 그래.”
“응? 뭐라구?”
전화기를 잠깐 내려두고 너를 본다.
“아니야.”
“미안해. 그래도 엄마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이 방법뿐이야.”
사과를 하지만 사실은 미안하지 않다.
우리는 1년째 연애 중이다.
나는 기다린다. 너는 이혼남이고. 나는 전도유망한(?) 미혼녀이므로.
한 2년 더 지나 선도 안 들어오는 노처녀가 되기를.
아무도 관심 없을 만큼 늙어져서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은 별로인 상태가 되어 너와 결혼해야지. 같은.
그 마음을 너는 읽었을까.
우리는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지금 나의 불행이 온통 너로 인한 것이라고 빙빙 돌려 너를 공격했다.
오늘처럼 선을 본 것을 숨기지 않거나
친구의 배우자를 칭찬했다.
그때마다 너는 내 은유적인 비난을 못 들은 척하거나,
오늘처럼 모호한 언어로 항의했다.
고개를 돌려 너를 본다.
너는 앞을 응시한다.
굳게 다문 입안에 담아둔 너의 한마디가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샌드 버튼을 누르고 기어 위에 올려진 네 손위에 내 왼손을 얹는다.
체온이 느껴진다. 뜨거운 듯도. 식어가는 듯도 한 온도.
손등은 원래 미지근한 법이니까.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하나둘 세어본다.
핸들을 꺾으며 너의 손이 빠져나간다.
민망한 왼손이 갈 곳을 찾는 동안 답장이 도착한다.
급하게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밀어 넣는다.
침묵의 무게를 덜어보려 라디오를 켠다.
늘 맞추어진 주파수에서 경쾌한 댄스곡이 흘러나온다.
슬픈 가사.
이별 후 홀로 일상을 보내는 이의 마음.
애수로 가득한 음률 안에 몸을 들썩이게 하는 리듬이 묘하게 어우러져
뭐랄까.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내 단점은 묻거나 답해야 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놓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게의 사람들이 그러하다 위로하며 지낸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이유로 오해하고 반목한다.
그래서 문학은 햄릿이나 인어공주처럼
제때 말하지 못하는 인간을 노래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궁금할 때 묻지 못하고
말해야 할 때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머뭇거린다.
엄마가 말하는 내 뾰족한 모서리들은 그러한 단점이 만들어낸 침식 같은 것이다.
자잘한 의문들이 내 안에 작은 상처를 만들고
크고 날카로운 모서리로 융기한 것.
그렇게 나를 진단하고 다시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
너의 얼굴을 바라본다.
날카롭고 차가운 너의 눈. 끝이 살짝 올라가 더욱 냉정해 보이는 너의 코. 굳게 다문 입술.
예민한 자들만이 가질 것 같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하나하나 쓰다듬듯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너의 차가운 옆얼굴에 주눅이 든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내 안에 융기한 거대한 모서리는
너의 작은 외면에도 깊숙한 울음소리를 낸다.
나의 불안을 네가 알 수 있을까.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열띤 갈망을
어떤 언어로 표현해야 너에게 다가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사랑을 구하는 반듯한 언어를 배우지 못한 이방인은
오늘도 입안을 맴도는 구애를 형체로 만들지 못한다.
너를 안고 싶다.
너를 안아 내 모서리의 날이 무뎌지기를.
언어가 무의미하기를.
창밖으로 멀리 둥그스름한 늙은 산이 보인다.
나는 어서 늙어져 저 산과 같이 둥글고 싶다.
너를 품어 보듬는 둥근 산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