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피로연은 무슨. 우리는 따로 놀자.”
혜정과 나는 피로연에 가지 않기로 한다.
은정이 옅은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린다.
나는 혜정의 표정을 동시에 살피며 부드럽게 말한다.
“은정아. 기분전환 하고 싶어? 그럼 우리끼리 갈 테니 다녀와. 마치면 전화해.”
“그래. 어차피 오늘 12시 전에는 안 들어갈 거야.”
어쩐 일인지 혜정이 늦은 시각까지 밖에 있으려는 거 같다.
은정의 눈은 이미 반대편 일행들을 향해있다.
혜정이 그런 은정을 보며 평소보다 노숙한 음성을 낸다.
“우리끼리 놀고 있을게. 얼른 가. 정민이한테 신혼여행 다녀와서 좀 여유 생기면 보자고 전하고.”
9센티 힐을 신은 은정이 살짝 뒤뚱거리며 멀어진다.
혜정과 나. 둘만 길 위에 남았다.
“어디 가지.”
“그러게. 배도 부르고.”
“영화 볼까.”
“야. 결혼식 갔다가 영화 보는 신부 절친은 우리밖에 없을 거야.”
“뭐. 어때. 좀 피곤해.”
“그래. 최대한 재미없는 걸로 보자. 좀 자게.”
우리는 통했다. 배는 부르고. 마음은 허전한 상태.
영화관으로 향한다.
가장 가까운 시간의 영화를 골라 표를 사고 로비에 앉아 입장 시간을 기다린다.
토요일 오후의 영화관은 제법 붐빈다.
혜정은 검은색 모직 바지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떼어내고 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너의 답을 확인한다.
- 예식장 좋네. 잘 놀고 내일 보자.-
너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는 그것.
한번 해본 혜정은 담담하게 머리카락을 떨어내고 먼 곳을 응시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 별 말이 없다. 혹시 내 스커트에 붙어 있을지도 모를 머리카락을 찾으며 그녀와 나란히 기다린다.
저쪽에 연인이 옥신각신 다툰다.
왜 이런 영화를 골랐냐. 너 혼자 봐라.
이런 걸로 제발 트집 좀 잡지 마라.
너는 늘 그런 식이지.
여자가 돌아선다. 남자는 혼자 남는다.
남자는 영화를 볼까. 여자는 돌아올까.
둘은 저 영화의 제목을 기억이나 할까.
이제 남자도 보이지 않는다.
벼랑 끝에서 중얼거리듯 흉내 내본다.
“너는. 늘. 그런 식이지.”
“화장실 갔겠지.”
무심한 듯 혜정이 뱉는다. 보고 있었구나.
“그래. 그랬겠지.”
잿빛 스커트에 머리카락이 한 올 보인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집어 결을 느껴본다.
지문과 지문을 문지르며 가늘고 둥근 머리카락을 굴려본다.
한 번 더 되뇐다.
“너는 늘 그런 식이지.”
나의 이별에 빠지지 않았던 이유.
나의 연애가 종결되는 신호.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댄다.
정민은 2부 예식 때 옅은 민트색의 샤틴 드레스를 입고 제법 활짝 웃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어우러져 청순한 민트색이 더 푸르게 느껴졌다.
나는 푸른빛을 좋아했다.
“푸른색은 이별의 색 같아.”
그가 말했었다.
너와 헤어지고 몇 명의 남자들을 만났다.
네 빈자리는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누구를 만나도 두어달 정도가 지나면 시큰둥해졌다.
그리고 어느 여름에 그 빈자리를 채워줄 만한 남자를 찾았다.
그는 건강하고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 취약하고 민감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불균형에 매료되었다.
내가 모네의 그림이 들어간 작은 액자를 선물했을 때,
그 사람은 나에게 푸른색이
이별 이후에 밀려오는 깊은 감정의 파동과 고요를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오빠. 이거 맘에 안 들어? 그럼 노란 빛이 많이 들어간 그림으로 넣어줄까?”
그때 나는 몰랐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래로 만든 케이크처럼 곱고 부드러워 금세 형체가 사라졌다.
삼켜보려 애를 써도 혀 위에서 녹아 사라지는 눈가루처럼.
그의 언어는 희미한 푸른빛이었다.
나는 그의 언어를 사랑했다.
내가 형언하지 못하는 많은 형상과 실체들이 그의 입을 통해 구체화 되었다.
그의 입 속에서 푸른색은 이별이 되었고
어린 사랑의 버거움은 시가 되었다.
그러나 말로 만든 형상은 여물지 못하여 쉬 부스러졌다.
내 이별 통보는 그를 만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미 수 차례였다.
내가 이별을 말할 때마다 그는 숨었다.
채워지지 않는 그릇이 함께하면 가득 차오를 줄 알았던 우리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내 그릇을 채우는 것은 상대의 몫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배웠다.
예민한 자들이 무디거나 혹은 이기적인 보호자를 만나면 허기지고 가난해진다는 것을.
메마른 토양 위에 뿌려진 씨앗처럼 끝없이 갈망하게 한다는 것을.
‘너는 늘 그런 식이지.’
그가 어두운 방에 숨어들면 나는 독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내 마음에 융기한 비죽한 모서리가 독을 덮어 날을 벼리면
웅크린 그의 영혼을 베어내기에 충분했다.
생을 선으로 그리는 여자와 점으로 찍는 남자 사이에 간 극은
각자의 맥락 속에서 뒤틀리고 변형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차원에 갇혔다. .
왜일까. 오늘 같은 날 내 어두운 연애가 떠오른 것은.
또 다시 같은 비난를 하려는 것인가.
이제 너에게 덮어씌울 새로운 ‘그런 식’을 찾고 있나.
“나는 늘 이런 식이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혜정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그녀 앞에 큰 팝콘 상자가 놓여있다.
영화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