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네 원룸에 갔던 날.
옷장 문 안쪽에 걸려있던 양키즈 모자를 만지던 나에게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보스톤 레드삭스 좋아했었어.”
“응?”
은정이 네가 검은색을 좋아할 거라며 양키즈 모자를 골라주었던 게 생각났다.
우리는 프로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모자의 주인이 어떤 팀을 좋아하는지에는 신경을 두지 않았다.
검은색 모자를 머리에 쓰고 너를 돌아보았다.
“아직 이걸 가지고 있다니 놀라운데?”
기분이 좋아져서는, 너의 원룸에 와보길 잘 했다, 생각했다.
싱크대 앞에 서 있던 네가 다가왔다.
네가 일직선으로 나를 보며 걸어오면
나는 당황해서 불필요한 농담을 던지곤 했다.
“푸른색에 붉은 로고보다 블랙 앤 화이트가 더 세련됐어. 취향에 맞으니 여태 가지고 있었던 거 아냐?”
“너 그날 잘 돌아갔었는지 저거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항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이 들어왔다. 너는.
별거 아닌 것으로 지나치려는 내 노력이 무안하게
너는 늘 기억에 새겨지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게 하는.
“또? 또 무슨 생각 했어?”
행복감에 젖어 질문을 던지고 바로 앞에 선 너를 끌어안았다.
네 얼굴을 올려보았다. 모자챙이 네 표정을 반쯤 가렸다.
너는 내 머리 위에 씌워진 모자를 벗기고
가만히 나를 내려보았다.
“또... 너가 나쁘다는 생각?”
“뭐? 내가 나쁜 여자라고 생각했다구?”
나는 네 허리를 감았던 손을 급하게 풀었다.
너는 웃으면서 다시 나를 안고는.
“너는 나쁜 여자였고 나는 착한 남자였지.
그래서 너가 미웠고.
저 모자도 싫었고. 그래도 버리진 못했네.”
“뭐야. 별 의미도 없는 모자를 왜 그렇게 오래 가지고 있냐구. 너 이상해.”
나는 마음이 상해서 너를 밀어냈다.
“그런 게 있어. 자꾸 따라붙어 오는 거. 안 버려지는 거. 너는 그런 여자야.”
“뭐야. 나 그래? 나 질척거리나.”
“그러게 왜 그랬어. 좀 착하게 굴지.”
“야!”
“하하. 농담인데 진담이야. 나 너 원망 많이 했어.
그때 너가 날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성공한 남자로, 네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있었을 거야.”
너는 우리의 이별을 내 탓으로 돌렸다.
만약에. 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그러지 않았다면, 같은 후회로 내려 앉았다.
너는 손에 든 모자를 다시 내 머리에 씌웠다.
“넌 너를 너무 몰라. 니가 어떤 여자인지.”
잠시 어지러웠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를 너를 통해 알게 했다.
너는 그런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