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혼을 앞둔 혜정에게 말을 못 했으니
이미 해낸 은정과는 대화가 될는지도 모른다.
버스로 다섯 정류장 떨어진 은정의 아파트로 향한다.
은정은 큰 아파트에 산다.
엄마가 살던 집. 엄마가 아저씨와 살던 집.
엄마와 아저씨가 차례로 암 선고를 받으면서
두 사람은 도시를 떠났다.
그녀의 집에 가면 요즘 유행하는 요리를
최고의 맛집에서 배달시킬 수 있다.
나는 입맛이 없거나 슬프거나, 짜증 나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그녀의 아파트에 간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매운 족발을 뜯다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단순해진다.
삼키거나 뱉거나.
은정은 전남편과 헤어지고 매일 먹고 마셨다.
바에 가서 위스키를 마셨고
불닭발이나 치즈떡볶이, 보쌈족발 같은 것들을 추가메뉴까지 더해서 먹었다.
어두운 집에서.
은정의 엄마는 나날이 더해 가는 그녀의 체중을 보기 힘들어했다.
두 사람은 매일 다퉜다.
은정의 엄마는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교 학부모회장이었다.
은정은 성적이 썩 좋지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아 늘 반장을 했다.
그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려는 것 같았다.
은정의 체중은 이혼 후 반년 만에 정확히 18킬로그램이 불었다.
그녀의 귀여운 얼굴은 동그란 달덩이가 되었다.
그녀는 눈을 길고 가늘게 늘어뜨리며 웃는 바텐더와 연애 중이다.
소곤대며 말하는 그 남자에게
큰소리로 전남편 이야기, 엄마 이야기, 새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그 남자는 은정의 심리상담사인 양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잘 견딘다.
속삭이듯 말하고 눈웃음을 만들어 은정을 위로한다.
그리고 그녀의 큰 아파트에서
매일 저녁 바(bar)로 출근한다.
“은정아, 그래도 전남편 이야기는 이제 안 하는 게 어떨까.”
“응? 내가 그 얘기를 했어?”
나는 이제 그녀가 전남편을 보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혼하고 열흘 만에 미니홈피에
'생일 축하해. 사랑해' 문구가 새겨진 케이크 사진을 올린 그 남자를.
파렴치한 전남편의 그림자를 훌훌 덜어내고
가뿐하게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와
단호하게 전남편 이야기는 듣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남자와 연애하기를 바란다.
그녀의 큰 아파트에.
눈이 가느다란 고양이가 산다.
밤마다 집을 나서는 그 고양이가 언제까지 그녀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한다.
네 연애도 불완전하니까.
키를 맞추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내 연애의 시작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