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잡는다

18

by ZAMBY



스물여섯의 결혼.


이듬해 1월에 태어난 아이.

급하게 취업한 회사의 박봉과 잦은 야근.

반복되는 다툼과 오해.

누구라도 그려볼 수 있는 과거다.


너는 면접시험장에 앉은 취업준비생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지난 세월을 브리핑한다.

네 앞에 놓인 바삭한 탕수육이 소스에 눅진하게 절여질 때까지

한 번도 젓가락을 들지 않는다.

나는 너의 잔에 가끔 술을 부어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렇지 않다. 너의 지나온 이야기. 나도 그만큼 지나온 시간.

초조해 보인다.

그 모습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나도 썩 즐겁지만은 않았어. 다 그렇지 뭐. 20대는.

허둥대고 실수하고. 그래서 실패하고.”

그리고 덧붙인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20대로. 지금이 좋아.”

너는 한동안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짧게 내뱉는다.


“여전하네. 똑같다.”

네 날카로운 눈이 툭 뱉는 너의 말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항상.


단편소설을 한 권 읽어낸 듯

나는 머릿속에 몇 가지 장면들을 그린다.

너는 희고 작은 잔을 긴 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입가에 댄다.


잔을 따라가던 내 눈을 마주한 너는

어울리지 않는 순간에 기어코 환하게 웃는다.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보지마. 그런 눈으로 보지마. 그렇게 웃지 말라고.'

'그건 반칙이야. 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 잊은 표정을 짓는거지.'


내 말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너는 성큼 다가선다.


너는 늘 나의 침묵을 몸으로 끌어안았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너의 문장들은 언제나 여지를 남겼다.

나는 수많은 질문들을 머금고

그것들을 어떻게 형상으로 만들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종종 침묵했다.


우리가 처음 밤을 함께 보냈던 봄이었다.

어떤 질문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대답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순간.

너는 비밀을 들추는 최면술사처럼 부드럽게 물었다.


“너는 어떤 사람을 만났었어? 나 만나기 전에?”

“응... 그냥 학교 선배였어.”

“이전 학교? 아님 지금?”

“이전. 스무살 때”

“왜 헤어졌어?”

“모르겠어. 그냥 좀 지루했던 거 같아.”

“지루했다구?”

“응. 별로 보고 싶지 않았어.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서운했던 거 같지도 않고.”


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단단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지루하지 않게 할 자신이 있어.”

“어떻게? 내가 왜 지루했었는지 나조차도 몰라.”

나는 웃었다.

“나는 그런 남자야. 네가 늘 사랑하게 할 수 있어. 지루하지 않을 거야.”

“내가 늘 너를 사랑하게 할 수 있어?”

“그럼.”


나는 방법을 물었고 너는 명제를 말했다.

이유를 묻는 자에게 당위를 말했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너의 말들은 모두 자기실현적이었다.


“그날. 나 회사 차에서 뛰어내렸었어.”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날?”

“그래. 그날. 너 강남역 앞에서 만난 날.”

'그날'을 움켜쥐는 듯 말하는 너.


독일에서 온 바이어를 모시러 가는 길이었고.

강남역 5번 출구 앞에 서 있던 나를 보고

운전대를 동료에게 맡기고 차에서 뛰어내렸다고 말하여 웃는다.


너는 늘 내가 듣고 싶은 말의 표면만을 말한다.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은 설명하지 않는다.


내 표정을 읽었을까.

너는 웃음을 거두고 시선을 가다듬어 내 눈을 곧바로 바라본다.

내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까지.

그리고 명징하게 내뱉는다.


“보고 싶었어.”

낯익은 중식당,

손님들이 사라진 늦은 저녁,

적막한 홀 안에 앉은 너와 나.


너는 내가 알던 그 온도로 손을 내민다.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너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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