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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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BY



혜정을 만나는 날에는 별다른 꾸밈이 필요 없다.


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살고

그래서 우리는 동네 오래된 맥주집에서 만난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긴 의자와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은.

우리가 대학 때도 왔다면 있었을 거 같은 그런 호프집.

끈적한 메뉴판에는 과일모둠. 감자튀김. 쥐포와 땅콩. 같은 메뉴들이 보인다.


가볍게 메뉴를 고른다.

"쥐포와 땅콩“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는 그녀의 동그란 눈을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친다.

"너는? 배고파?"

혜정의 눈이 다시 제 크기를 찾는다.

"응 나는 치킨 먹을래."

"그래. 그럼 치킨 먹자. “


우리는 곰팡이 냄새가 뭉근히 나는 어두운 호프집에 마주 앉아

뼈가 없는 닭튀김을 먹는다.

각자 앞에 놓인 500cc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다.

구석에 낡은 에어컨이 드릉. 윙 소리를 낸다.

머리에 웨이브를 촘촘히 넣은 사장님은 건너편에서 티브이를 올려다본다.

우리는 단골이지만 사장님은 아는 체하지 않는다.


노르스름한 소스가 듬뿍 발린 치킨을 한입 넣고 혜정의 입이 우물거린다.

할 말을 가득 담은 입술이 접혔다. 펴졌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헤어지기로 했어."

"뭐? 이혼한다구?"

"응. 그런데 지금은 별거."

"그럼 너는 어디로 가? 걔가 나가?"

"아빠 집에 갈 거야. 거긴 걔 거잖아."


혜정은 남편이 살던 임대주택에 들어갔었다.

임대주택은 참 좋은 제도라고 우리끼리 야무진 남편을 칭찬하기도 했다.

단출하고 아늑했던 그 집에서 그녀가 2년 만에 나온다.

언니. 동생.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는 30년 된 주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버지는? 알고 계셔?"

"응 말했어."

"뭐라셔"

"그냥. 괜찮대."

"언니는?"

"몰라."


혜정의 언니는 3년 전에 이혼했다.

그래서 이제 그 집에는 왕년에 힘든 결혼생활 좀 해본 여자 둘과. 예순이 넘은 남자 하나.

그리고 연애만 하는 젊은 남자가 살게 되었다.


혜정의 언니는 고시 공부하던 남자와 결혼했다.

언니는 그림을 그렸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번 돈으로 남편을 뒷바라지했다.

몇 번 시험에 떨어지고 혜정의 형부는 자꾸 PC방으로 향했다.

언니는 매일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면 형부를 찾으러 동네 PC방으로 갔다.

사람 좋은 형부는 '응 왔어?'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봄에. 언니는 형부를 데리러 가지 않았다.


언니는 아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임기제 교사지만 이제 어엿한 학교 선생님이다.

형부는.

모르겠다. 아직도 그 PC방에 있는지.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남의 이야기를 한다.

연예인이 연애한다는 이야기. 어제 개봉한 영화가 기대된다는 이야기.

혜정이 다니는 학원에 어느 학부모의 이야기.

학원에 아이를 맡기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믿는 그런 부모들.


혜정도 자신감에 가득 차 남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더 나은 직장을 구하는 2년을 혼자 벌어 가정을 유지했다.

결국 그는 전보다 나은 직장에 들어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멀어졌다.


현실적 불안을 충분히 감내할만한

애정과 신뢰를 자신했던 두 여자는

각자의 자신감을 실수 혹은 팔자 같은 모호한 개념으로 덧씌웠다.

인간이 어떤 관계를 매듭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관계를 연결하는 이유가 하나였다면

그것을 끝나게 하는 것도 그 하나일까.


이제 혜정은 오래된 주택으로 돌아갈거다.

그래도 다행이다. 돌아갈 곳이 있어서.

돌아갈 곳이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혜정의 엄마도.

혜정도.

혜정의 언니도.

그들은 무너지지 않는다.


혜정에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내일 너를 만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끝을 말하고 있고 나는 어쩌면 시작을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기에

우리의 대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긴다.

나의 시작이 불안해서, 혜정의 끝이 너무나 여물어서.


우리는 그저 뼈가 없는 닭튀김을 묵묵히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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