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숙집 앞 계단.
네가 앉아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하루종일 너에게서 연락이 없었고,
나는 하숙집 여자애들과 분식집에서 김치볶음밥이며 우동 같은 것들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뭐야. 서프라이즈하려고 했나보네.”
제주도 언니는 웃으며 내 어깨를 떠밀었다.
너는 멋쩍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 태도가 낯설고 신비로웠다.
한 살 어린 네가, 마치 열 살은 먼저 산 남자처럼 나를 응시할 때
귀 안이 먹먹해지곤했다.
“뭐야. 전화도 안 하구.”
나는 약간의 투정을 섞어 인사를 건냈다.
몸이 살짝 비틀렸다.
“응. 미안해.”
너는 긴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네 손이 닿으면, 나는 처음 태양 아래 나온 나비처럼 온몸을 떨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잠시 조용했고, 얼마 후 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아버지 기일이었어.”
네 목소리가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동안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하숙집 대문을 보며 나란히 앉아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하는 걸까?”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늘 주변을 맴돌았다.
“나 가톨릭 신자야.”
너는 웃었다.
“하지만 나는 천국에 가는 죽은 자의 영혼이 여기에서의 삶을 기억한다고 생각 안 해.”
“그럼? 그럼 리셋되는 거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 개념이랑 비슷해. 그냥 원자나 분자 같은 걸로 천국에 가는거지.”
“그 상태에서 좋은 걸 알 수 있어? 천국이 좋은걸?”
“원자나 분자도 안정된 상태를 좋아하지 않을까?”
우리는 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대신 그의 물리학적 상태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의 관심은 늘 현재에서 시작하지만 이내 보이지 않는 곳을 향했다.
친구들이 지루해하는 나의 질문이나 사유들이
너에게 닿으면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날 너는
어머니가 그간 고생하신 이야기를 짧게 했고,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고 사업을 하시느라 늘 밖으로 나돌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를 꿀꺽 삼켰다.
일본에 가 있는 동생과 어렸을 때 다툰 이야기도 했다.
슬픈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누구나 가족에게서 받을 법한 상처.
가족들에게서 느끼는 소외감, 혹은 연민. 같은 것들.
웃으면서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너에 비하면 단촐한 내 가족사도 꺼내어 놓았다.
서로를 만든 가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역사를 끌어안는 일이라 믿었다.
그리고 갑자기
네가 사라진 지난 겨울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갑자기 연락이 안되서. 놀라진 않았어?”
“그때?”
나는 네가 어느 그때를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모르는체 했다.
답하고 싶지 않았다.
“너 만나기 전에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어.”
순간,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없는 전화번호'라는 멘트를 듣고 있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 그래서 헤어졌고.”
너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반으로 접은 냅킨 모서리를
손톱으로 문질렀다.
“그 여자한테서 연락이 왔었어. 그래서 전화번호를 바꿨어.”
네 지난 연애의 결말을 듣고, 접었던 냅킨을 펼치며 말했다.
“소주 한 병 더 마실래?”
나의 첫 연애도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연애를 스스로 종결했다.
스스로 매듭지은 관계는 전화가 걸려 온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나는 너를 비난하거나 원망할 명분도 찾지 못해서
합당하다 싶은 인사를 했다.
“고마워. 얘기해줘서.”
“미안해.”
“뭐가 미안해. 이미 정리된 거잖아.”
“응. 정리되었어. 그리고 너한테 다시 전화한 거야.”
“그럼 됐어.”
햄버거 가게에서 너와 보냈던 장면들이 몇 가지 떠오르다 흐려진다.
“지금은 나랑 하는 거잖아. 연애.”
너는 조용히 웃는다.
“그래 너랑 하는 거야. 이제부터.”
이제부터.
나는 또다시 미시적인 추궁을 해내려는 욕구를 지그시 눌렀다.
너는 내 손을 잡았다.
한마디만 더 해주었으면.
그러나 너는 말 대신 행위로 표현한다.
나는 너의 손을 밀어내지 못했다.
묻지 못하고 답하지 않은 채 밤이 깊어갔다.
질문 없는 사랑은
믿음과 불신.
양 극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