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 마음을 졸이며 입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접을 보고 온 후, 괜한 욕심을 부렸던 것 같아 부모님도 나도 침울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냥 안전한 곳으로 지원할걸. 대학들이 속속 합격자를 발표하고 있던 즈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시에는 합격자 명단을 가장 먼저 학교 운동장에 붙였다. 같은 대학에 지원했던 친구가 명단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너 합격했더라’. 그 말에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집 안을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질렀다. ‘붙었대!!!!’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합격만큼이나 기뻤던 것은 독립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합법적으로 부모님의 곁을 떠나,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나를 막아설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격적인 치의예과생이 되었다. 치과대학은 치의예과 2년 치의학과 4년, 총 6년으로 구성된다. 예과 2년은 생물학, 화학, 수학, 영어, 교양과목 등등 본과에 들어가기 전, 기초과목을 공부하는 시간이다. 본과에서는 오로지 치과와 관련된 전공과목만을 공부하기 때문에, 예과에서 치과의사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한다는 취지였다. ...만, 그런 취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예과 성적은 본과로 올라가지 않는다. 어디에도 써먹을 일은 없었다. 귀가시간을 체크할 엄마도 없었다.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본격적으로 놀아볼 시간이었다.
강의실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 동기들은 학생회관이나 식당에서 오랜만에 나를 만나면 반가워했다. 가끔 레포트가 있는 아침에만 중앙 전산원으로 가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레포트를 얻어다가 얼기설기 베꼈다. 수업시간이 다 되어서야 급하게 출력을 해서 헐레벌떡 제출을 했다. 낮에는 동아리방, 밤에는 학교 앞 거리가 나의 주 서식지였다. 재수에 실패했던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가 삼수 끝에 같은 학교로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캠퍼스 안팎을 함께 누볐다.
이렇게 신나게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었지만,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해보겠다고 책을 들고 동기를 사이를 기웃거리면서 알았다. 이곳에는 저엉말 천재 같은 아이들이 버글거린다는 것을. 나도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와보니 정말 평범하다 못해 겨우겨우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엄지손가락 길이만큼 두꺼운 생물학 원서를 눈으로 따라가며 직독 직해해서 줄줄줄 읽어주는 아이, 공학 수학을 순식간에 풀어내는 아이… 수능 대박러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래도 예과 2년동안 성적은 안중에도 없이 재미있게 보냈다.
예과 생활 2년이 지나고 본격적인 치과대학생이 되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동기들까지도 정신 차려서 공부를 시작했다. 본과 성적은 중요하다. 성적이 좋아야 졸업 후 원하는 병원, 원하는 과에서 수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각 학교에서 공부로 주름 좀 잡아본 수재들이었기에 과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수업 분위기도 사뭇 빡빡해졌다. 예과 때까지는 메인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본과부터는 병원, 치과병원이 있는 별도의 캠퍼스에서 생활했다. 치과대학 건물에는 강의실이 단 두 개 있었다. 1학년 강의실, 2학년 강의실. 하루 종일 한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거나 실습실에서 실습을 했다. 3, 4학년이 되면 병원 지하에 있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학습해야 할 양이 많아지고, 시험도 잦아졌다. 중간, 기말고사도 있었지만 중간에 퀴즈나 땡시 (방사선 사진이나, 모델을 보면서 보는 시험) 같은 것들도 끼어들었다. 필자도 본과가 시작되면서는 정신을 차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공부에 힘을 쏟았다. 남부럽지 않은 엉덩이의 힘을 갖고 있었기에 노력에 있어서는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그저 그랬다.
그때 알았다. 각 학교의 1등들을 모아놓아도, 거기서 1등부터 100등이 생긴다는 것을. 그 안에서도 놀아버리는 아이, 열심히 해도 성적은 그저 그런 아이, 포기하는 아이들이 생긴다는 것을. 유급의 위기를 겪는 아이들도 있었다. 분명히 고등학교 때는 촉망받던 우등생들이었을 텐데도. 나도 수능 대박러의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천재 아니면 수재인 친구들 사이에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내 실력에 맞추어서 대학에 갔었더라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고, 내가 맞았던 대운을 원망하기도 했다.
치과대학에서는 머리가 좋지 않으면 손이라도 좋아야 한다! 치대에서는 학년이 올라가면 실습이 많아진다. 입안에 들어가는 각종 보철물(인레이, 크라운, 의치-틀니 등등), 교정 장치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고, 모델 치아를 깎고 때우는 실습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손재주도 없다는 거였다.^^ 치과에서는 그런 사람을 '곰손'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필자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두 팔에 손이 아닌 발을 달고 있는 사람. 뭘 해도 손끝이 야무지고, 빠른 사람들이 있지 않나. 요리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가구를 만들든. 나는 전혀 그런 축이 아니었다. 실습시간마다 과제를 해내느라 허덕였다. 늘 시간에 쫓기다가, 엉성한 상태로 제출하고는 했다. 동기들 중에는 마치 기공사인 것처럼 번쩍번쩍한 기공물을 제출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거기에 대면 내 것은 곰이 만든 것이 확실한 모양새였다. 어설프고 거칠었다.
자신감 있고, 여유롭던 내가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똑똑한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법도 했다. 그러나 눈앞에 놓인 시험과 과제를 해치우느라, 그럴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어느덧 20대 중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