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과 수련을 받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바로 개업을 할 수 있다. 학생 시절에 치과 병원에서 다양한 실습과 진료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바로 개업을 하지 않고, 페이닥터로서 조금 더 경력을 쌓는 경우가 많다. 치과 의원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으면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혹은 자신만의 전문분야를 만들기 위해 수련을 받는다.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것이다.
치과대학도 의과대학처럼 진료하는 영역에 따라 과가 나누어져 있다. 치과 보존과는 충치가 생겼을 때 때우고, 신경치료를 하는 곳이다. 치과보철과에서는 치아를 씌우거나, 치아가 없는 곳에 틀니나 임플란트 등으로 메꾸는 진료를 한다. 수련을 하면 이런 과목들 중에서 한 분야를 골라, 더 깊이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필자는 졸업 후 꼭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내 병원은 열거라는 의지나 포부도 없었다. 개업을 한다는 것은 치과의사로서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입 안만큼 좁은 치과에 나의 평생을 바치지는 않겠다는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고, 파트타임으로도 일을 할 수 있는 페이닥터를 할 생각이었다. 다만 오랫동안 페이 생활을 하려면, 전문 분야가 있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련을 받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선배들은 페이를 하기에는 '교정과'가 괜찮다고 권유해 주었다. 교정과는 그 학번에서도 가장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가는 곳이다. 필자는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에 학교 병원에 남아서 수련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외부에 있는 한 치과병원에서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어렵게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다시 막내가 될 시간이었다.
수련의들의 공간을 '의국'이라고 부른다. 그곳에서 10명 내외의 의국원들이 함께 생활했다. 의국은 보통, 병원의 환자들이 지나가지 않는 동선,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돌아보면 군대 내무반의 모습이 의국과 비슷할 것 같다.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계급장을 달고 있고, 그 계급에 따라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군인들도 계급장을 바꿔 달 때마다, 자세도, 복장도 한결 후리(?)해지지 않는가. 의국 안에서도 똑같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조금씩 애티튜드가 달라진다. 1년 차 때는 순하디 순한 눈빛으로, 윗 연차들에게 깍듯이 존대하던 사람이, 하나 둘 후배가 들어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선배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날카로운 눈빛과 말투를 장착하고는 후배들의 군기를 잡기도 한다.
이렇게 치과의사 사회가 빡빡한 위계질서를 갖고 있는 이유는, 치과에는 기술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인 듯하다. 이론을 바탕으로 하지만 손기술로 진료를 하다 보니 교육 방식이 도제식이다. 교수님이나 선배들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조하면서 배우고, 그것을 내가 진료를 하면서 적용해 보면서 기술을 익혀나가는 방식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지위에 따라서, 연차에 따라서 위계질서가 확실하다.
1년 차 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진료가 아니다. 의국의 자질구레한 잡일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프린터에 잉크가 떨어지면 받아와서 채우고, 세미나가 있을 때는 미리 강의실을 준비해 두고, 의국의 행사가 있을 때는 전화를 돌렸다. 진료 중간중간에 요령껏 이런 일들을 처리했다. 그때 가장 신경 썼던 일 중 하나는 '그대로 토스트'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사 두는 것이었다. 당시 파리바게뜨에는 '그대로 토스트'라는 식빵이 있었다.(지금도 있긴 한데 그때와 따르게 빵이 얇아졌다.) 의국원들은 아침식사로 그 빵을 토스터에 구워서 잼을 발라 먹었다. 빵이 부족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출근길에는 항상 그 빵을 사들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진료시간에 진료를 하는 것은 수련 생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진료시간 전, 후에도 항상 의국에는 불이 켜져 있다. 환자를 진료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진행 과정을 원장님들이나 선배들과 함께 검토한다. 각종 세미나가 있어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발표 준비를 하거나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를 하기도 한다. 입 안에 들어가는 기공물도 직접 만들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보니 진료 후에도 늦게까지 병원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말에도 자주 출근을 했다. (응급상황이 없는 교정과에는 때문에 당직이 없다.) 의국에 남아 일을 하고 있으면 가끔 전화가 왔다. 술을 좋아하시는 원장님께서 동료들과 한잔하시다가 의국으로 전화를 거신 거였다. (거국적으로 한 잔 하는 것을 좋아하는 원장님이었다.) 그러면 의국원들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치킨집이나, 횟집으로 향해야 했다. 밤늦게 의국으로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우리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곤 했다.
군대에서도 힘든 생활을 버티면서 선임, 후임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든다. 지나고 나면 군대 얘기가 가장 재미있다. 나에게 수련 시절도 그렇다. 참 빡세고 고된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함께 했던 선후배들과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힘들었던 일들은 잊히고 그 생활도 추억으로 남았다. 치과의사로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기도 했다. 어엿한 전공이 생겼고, 수련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디 가서도 부끄럽지 않게 진료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수련까지 마쳤으니, 이제는 정말 치과의사로서의 날개를 펼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