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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디아이 Jul 03. 2024

자연친화 대안학교에 보낸 이유

몇 번이나 되감기 해도 인생 테이프는 호기심 스위치를 껐던 그때 멈춰섰다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던 시기가 언제인지 이제 알았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바야흐로 초등학교 2, 3학년 때다. 몇 번이나 되감기 해도 인생 테이프는 호기심 스위치를 껐던 그 때에서 항상 멈춰 섰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엉뚱한 상상'을 잘하는 어린이였다.

상상은 수업시간 질문으로 이어졌고 보수적인 담임 선생님들은 나의 질문을 수용하기엔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정년퇴임이 너무 코 앞이었다. 반면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매우 적극적이었고 내가 무척 따랐지만 1, 3학년 선생님은 유치원에서 갓 올라 온 반 아이들을 매로 손바닥과 엉덩이 체벌을 자주 했다.

선생님의 지적에 엄마는 내게 학교 가서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고 야단치셨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흘리는 소리를 이따금씩 주워 들었다. 그 시기에 나를 에워싼 감정은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악 중의 죄책감 문화 '수치심'이었다. 부끄러움을 넘어 8,9년 살아온 어린이 인생 통틀어 망신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나는 그때부터 엉뚱 발랄한 호기심 스위치를 껐다.

그러다가 초등 5학년 나의 상상력이 다시 빛을 발하였는데 그건 바로 담임 선생님이 매일 검사하는 일기 숙제였다. 매일 2명이 뽑혀 교탁 앞에 나와 일기를 낭독을 했다. 만천하에 알리는 글이 일기인지 에세인지 모를 내용이었지만 수업시간에 상으로 수여받은 사탕을 바로 까먹을 수 있기에 일기상은 은근히 치열했다. 나는 거의 매일 고정적으로 사탕을 먹었고 나머지 한두 명은 매일 바뀌었다.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친구들에게 알려주라는 선생님의 지령을 받기도 했다.

그 후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살다가 중학교 3학년 국어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내 자존감은 다시 살아났다. 선생님은 창작 글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라 매 수업시간마다 아이들에게 즉흥적이고 재미난 창작 단편 소설을 쓰게 하셨다.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글짓기 주제에는 흥미도 없고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국어 시간에 진행된 상상력을 발휘한 글쓰기는 매우 즐거웠다. 매시간 내 글이 지목되어 일어나서 자주 낭독하였고 선생님은 교무실로 나만 따로 불러 글쓰기 코칭을 해주시는 등 내 글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 아버지를 흉본 일기장을 들켜 심한 괴롭힘을 당하고 갈기갈기 찢어버린 사건과 입시를 위한 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일기와 글쓰기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말이다.


평소 혼자 상상하던  소재들이 비슷하게나마 영화 소재로 나올 때면 신기했다. 가장 비슷했던 건 짐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였다. 개봉 후 꽤 지나서 영화를 알게 되었지만 처음 보고 '아, 나만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혹시 너도 살면서 이러이러한 생각을 해본 적 있니?' 하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본 적도 있다.


글이 완성되기까지는 머릿속 공상이 필요하고 지면에 흑심을 떨어트리는 동시에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대중의 간편한 테스트 보다 깊숙한 심리학회에서 이루어지는 성격유형검사(MBTI) 연구한 자료를 보면,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대체로 내향적인 사람이 많은데, 이는 전체의 70%를 차지할 정로도 압도적인 분포라고 한다. (나의 경우 20대에 가장 외향적이었던 것 같다.)

어린이 시절 말보다 글이 편한 나의 느린 기질과 다수 앞에 나서서 조잘조잘 말하지 않는 기질을 뿌리 뽑겠다고 7,8살부터 웅변 학원에 보낸 나의 엄마나, 억지로 학원 교탁 앞으로 끌려 나와 '남이 쓴 글'을 외치며 웅변했던 나나. 범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긴장의 땀을 흘리느라 여러 방편으로 '애'들을 많이 썼다. 


"~~라고 외~칩니다!!"

"더 크게 외쳐! 더 크게!!!"


(중간까지 개미 소리로 읽었더래도 마지막에 '외칩니다'만 크게 외치면 만사 오케이)



학창시절 식물에 물을 뿌리는 엄마를 지켜보다가 미친 척하고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엄마, 잘하면 식물도 아픔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랬더니 엄마는 딸의 엉뚱한 질문으로 느꼈던 수치심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말이 되는 소릴 하고 앉아있냐면서 격정적으로 소리치고 나서도 한참을 노려보셨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으르렁 거리는 퓨마 한 마리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식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식물은 뇌와 신경체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위협을 감지해 화학물질을 방출하는 등 자기방어기제를 펼칠 수 있다는 결과들이 있었다. 식물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는게 인간과 다른 점이고 자신만의 체계로 방어기제를 펼쳐야 하기에 인간이나 동물의 뇌 시스템 체계로만 접근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면 식물 '미모사'의 경우 곤충이 잎을 갉아먹을 경우 잎을 축 쳐지게 만들어 시들어 죽어버린 것처럼 위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100프로로 생각의 가능성을 닫아 두는 일은 없었다. 과학적 근거를 고사하고 자녀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 여겨지더라도 엄마가 아는 아줌마들을 대하듯 나의 인격을 존중했다면 모녀 사이가 이렇게 벌어지진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말이 될 수 없는 호기심을 존중받은 사람은 다른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사랑의 힘은 인간을 이롭게 만드는 무한한 에너지다. 존중된 질문은 하늘에서 비행기를 날게 했고 테슬라를 넘어 화성에도 닿았다.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은 야무지게 챙기지 못하여 비서직에서 해고되었으나 어릴 적부터 유별나게 몽상가 기질이 있어서 ~되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자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했다.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은 그때그때 만났던 타인의 평가나 나의 성적에 따라 널을 뛰었고 나의 가치는 존재 자체가 아닌 내가 가진 능력에 따라 좌우됨을 실감 나게 실감했다. 미술시간에 창작물 만들기에서 1등한 사실이나 음악시간에 재능을 발휘한 일을 엄마에게 알렸으나 엄마는 알았어도 몰랐다. 그저 수학을 못하는 사람이 잘하는 분야일 뿐. 그래도 높이 사는 부분이 있다. 떠오르는 햇살 저 편에만 존재하는 미지의 신념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녀를 훈육한 엄마의 애절함이다. 그게 자녀의 입장이 아닌 명확한 기준 없는 자신만의 세계였기에 스스로도 괴로웠을 엄마의 마음이 무척 안타깝지만 말이다.


나 또한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아이가 엉뚱한 질문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답답해 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잘 안다. 그 감정은 어린 시절 받아들여지지 못한 나의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알파파가 방출되고 있는 꿈을 꾸는 아이로서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을.


대안학교는 수와 셈, 음악, 신체, 동식물, 곤충 등 어떤 분야든지 간에 아이가 자신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경향성이 더욱 짙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질을 펼치고 천천히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곳, '너는 키가 작다'는 동년배의 놀림에 '나는 달리기를 잘 해'라고 자신있게 답하면 상대도 장점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된 곳, 갈등은 똑같이 존재하지만 갈등 자체보다 이후 해결과정에서 지혜를 얻는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는 곳, 스스로 교과서를 만들기도 하고 핀란드 수학 교과서로도 공부하는 퓨전이 있는 곳, 선생님력보다 아이력이 큰 곳, 자연환경이 학생들의 에세이로 이어지는 곳, 선생님, 친구들, 선후배들과 교류하면서 재밌기도 하지만 다양한 인간상에 부딪치며 투닥거리기도 할 이 곳, 행복한 자유인을 꿈 꾸는 수지꿈 대안학교에 보내게 되었다.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거라는 보장이 없다.

미술심리에서도 초록은 자연이고 중용이다. 자연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어 자녀세대와 생각이 맞지 않는대도 힘과 위로가 필요할 때 함께 초록의 지혜를 나눌 수 있다. 초록은 학생들에게 조심성을 경고해 주기도 하고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어 신체의 균형과 용기를 얻게 한다.

그러한 특별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가며 커 갈 때, 아이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며 공생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ps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드라마 <미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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