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 표현은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나타낸다고 했다.
미술심리학에는 '동굴화'라는 그림 검사가 있다.
나를 잘 이해해야 타인 이해에 가까스로 가닿을 수 있기에 공부하는 사람 역시 여러 그림 검사를 받는다. 나도 처음으로 동굴화를 그려보고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자기 인식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방법과 순서는 어렵지 않다.
1.흰 종이를 받아 종이 뱡향을 자유롭게 둔다.
2. 동굴 안에 큰 원을 그린다.
3.동굴 안에 당신이 있고 원 안으로 보이는 바깥 세상에 무엇이 보이는지 그려보세요.
4.채색 30분 정도 (색연필 등)
독자들도 흰 종이에 순서대로 그림을 그려봐도 좋겠다.
나는 동굴 바깥 세상인 원 안을 우리 가족의 모습으로 채워 넣었다. 툇마루가 있는 집 마당이 보인다. 가운데는 평상이 있고 우리 네 식구가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게임을 돕고 남편은 쟁반에 과일을 가져왔다. 평소대로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목소리,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림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며 들었던 ‘나의 생각’이다. 우리 가족의 일상은 전반적으로 평온하고 잔잔한 분위기다. 눈에 띠는 건, 동굴 안을 검정 색연필로 칠했는데 원의 가장자리로 가까워질수록 점점 어둡게 채색을 했다는 점이다. 동굴 속 표현은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나타낸다고 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내가 포함된 행복한 가정을 마냥 신나게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가족과 내가 꾸린 가정의 행복도와의 괴리감이었다. (참고로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평온하고 무탈한 하루하루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라는 불편감과 일말의 죄책감이 무의식에 남아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어른이고 다른 사람들과 신명나게 잘 살아가고 계신다. 이제는 마음의 덫에서 스스로 벗어나 그들과 나의 삶이 거의 분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림에 나타난 무의식은 아주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딘지 모르는 그늘이 표현되어 있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 있다. 겉 보기에 괜찮아 보여도 누구나 자기만의 어두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느꼈던 결핍을 들여다 보고 내 가족의 의미 그리고 현 시점의 ‘미해결 감정'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 감정은 실제 삶의 태도와 연결돼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레고 한 판을 벌이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탁에서 할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속 무언가 울렁임을 느꼈다. 그게 무슨 감정일까 잠시 생각해 보다가, '아련함'쯤이라고 해둔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오늘 보는 아이의 모습은, 아이의 가장 어린 마지막 모습이라고.
턱을 괴고 있던 손의 새끼손가락이 콧구멍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아이들을 응시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우리 부부가 죽어 없어지면 우리를 그리워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그럴 시간에 추억의 한 페이지 안으로 풍덩 들어가면 될 일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식탁 위에서 가정의 울타리가 견고한지 아닌지 붙잡고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때대로 내가 잘 있나 확인하듯 미처캣처럼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고, 무표정이었던 나의 얼굴에는 급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가 가끔은 내 옆을 뛰어 지나가는 딸아이 팔이 붙잡힌다.
"자, 우리 안아주는 시간~."
아이들이 다다다 달려온다. 둘째가 먼저 내 다리 위를 선점하고, 그 뒤로 첫째가 줄을 선다. 아이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둘째는 어느새 제법 커서 발가락 아기 꼬순내는 사라지고 진짜 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내 콧구멍 아래에 위치한 둘째 정수리 꼬순내는 아직 남아있다. 다행이다. 이 냄새가 사라지기 전까지 엄마로서 만회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안도감일까. 첫째 머리에서는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나지만 엄마를 생각해서 줄을 서주는 성숙한 사랑을 풍겼다.
어릴 적 돌아가신 나의 외할아버지가 딱 그랬다. 중풍으로 거동이 매우 불편하셨는데 명절이면 현관 신발장 앞 의자에서 앉아 손주들을 기다렸다. 놀이터에 우르르 놀러 나갔다가 들어오던 우리 사촌들은 할아버지 옆을 지날 때면 반대편 벽에 양팔을 벌리고 바짝 붙어 연이어 재빠르게 지나갔다.
"꺅, 뒤에 조심해! 어, 알았어. 우리 잘 빠져나갔다!"
아이들 사랑이 컸던 외할아버지 손에 붙잡히면 누구든 보드라운 볼에 턱수염 문지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는 도망치기 바빴지만, 돌이켜보면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무해한 사랑의 표현 방식이었다.
나는 내 아이들을 만질 수 있고 그 사이에 들어가 함께 뒹굴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사랑이라고 느꼈던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었다. 아이 정수리에 꼬순내가 사라져도 내게 안기려고 뛰어와 줄까? 그래도 내심 달려와 줄을 서주면 좋겠다.
얼마 전에는 첫째가 와서 자기가 그린 음식 메뉴판을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엄마 우리가 식당을 차렸어. 한 번만 와봐. 제발~~"
'제발'을 붙이면 마음이 약해져 바로 일어나는 걸 아는 딸내미다. 첫째는 주방에서 우당탕탕 요리를 만들고, 둘째가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한다. 엄마르 기쁘게 하기 위한 반짝이는 눈빛 앞에서 이보다 죽이 잘 맞는 동업자도 없다. 메뉴판을 보니 제법 먹음직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물고기 샌드위치 --------10,000원
김치 소스 콩 -------------2,000원
감자 콩죽 ----------------1,000원
생선 콩튀김 ----------------500원
군침이 돌다가 메뉴 이름을 보니 도로 멈췄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일까.
"물고기 샌드위치 하나랑요. 김치 소스 콩자반?도 하나 주세요.
그런데... 와서 같이 드실래요?"
첫째는 맛이 어떻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니, 있을 수 없는(?) 레시피만큼 창의적인 답변을 해주고 싶어 뜸을 들였지만 더도 덜도 없이 상상했던 맛 그대로 설명한다.
"생선까스는 봤어도 생선 샌드위치는 생각지도 못했는 걸요? 나쁘지 않아요. 고소해요!!"
서빙하는 직원은 어느새 내 무릎에 앉아 시야를 뒤통수로 가리고 김치 소스가 묻혀진 (으으~)콩자반을 먹는 시늉을 한다. 양 팔뚝은 말랑말랑 사랑스럽고 머리카락 꼬순내는 구수했다. 나만의 이야기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시작되고 있고, 아이들은 요즘 내 손을 잡고 과거에서 지금으로 자주 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