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시절,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해본 적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회사의 조직원이 되는 것이 그냥 끔찍했다. 당연하게도 여러 종류, 여러 이유의 퇴사들이 있었다. 아니 입사?라는 것 자체를 덜 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20대를 최대한 느긋하게 보내던 나는 휴학을 두 번이나 했고 졸업하던 학기에는 여자들 중 최고참, 최고 학번이 되어 있었다. 취업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뭘 재밌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를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용돈을 받아쓰진 않았으니 이것저것 아르바이트하면서 돈을 벌고 또 돈을 다 쓰고, 아르바이트조차도 하지 않는 동안엔 많이 자고 뒹굴고 혼자 부산으로 훌쩍 떠나고, 그렇게 청춘을 낭비하는 낭만의 시절이었다.
낭만이라는 게 자고로 평생 없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게 시간이든 체력이든 돈이든 써버릴 때 더 우러나는 게 아니겠는가? 유한한 것을 알아차리고 아끼고 쪼개고 하는 순간 미래는 튼튼해질지 모르지만 낭만은 온데간데없는 법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 청춘을 낭비하던 낭만의 시절을 애정 한다. 후회 1g도 없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푼돈이랑 시간은 펑펑 썼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혼자 했던 여행이, 멍 때리고 앉아하던 공상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청춘이고 낭만이고 이런 말만 나오면 이렇게 설레는 나를.
낭만의 세기말이 끝나고 2000년대 시작되었다.
진지하게 전공을 살려 시작했던 첫 창업은 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점 웨딩 영상에 대한 비중이 커지더니 나중엔 웨딩 영상만 취급하는 업체가 되었다. 웨딩 영상 샘플을 처음 만들던 날에는 그냥 캠코더를 매고 집 근처 야외 웨딩을 하는 곳을 찾아갔다. 마침 어린이회관(어린이대공원 내)에서 야외 웨딩을 하고 있었다. 벚꽃이 얼마나 날리던지, 내가 잘해서는 아니고 그냥 풍경이 좋아서 영상이 좋았다.
막무가내로 찾아가서 돈은 안 받겠다, 샘플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면 영상을 찍어드리겠다 했더니 오케이 하셨는데 그분들이 무려 뮤지컬 배우였다. 축가도 어마어마했다. 친구분들 인터뷰를 많이 찍었는데 친구분들도 배우라서 그런지 끼가 뚝뚝! 말씀도 재밌게 잘하셨다. 그때 축하 인터뷰를 했던 친구 중에는 지금 어마어마한 대배우, 누아르 장르의 아이콘 같은 배우도 있었다. 그렇게 엉겁결에 아름다운 풍광, 재치 넘치는 친구들이 잔뜩 있는 뮤지컬 배우의 야외 결혼식을 웨딩 영상 샘플로 찍게 된 것이다.
그렇게 좀 잘 나온 웨딩 영상 덕택에 웨딩씬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마구잡이로 시작한 영상업체를 그렇게 1년 좀 넘게 하다가 내가 창업한 회사에서 퇴사를 해버렸다. 아직 운영이란 걸 할 수 있는 깜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였달까? 그리고는 웨딩플래너가 되었다.
이런 내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애사심이 끓어오르던 시절은 웨딩플래너가 된 직후이다. 매칭 커플로 이미 유명했던 '듀오'에서 결혼 준비를 하는 웨딩컨설팅팀을 만들고 난 직후였다. 공채 공고를 보고 응모했고, 어쩌면 처음 체계적인 회사 조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웨딩플래너 업무를 처음 배우고 조직원으로서 성장하던 그 시절은 지금 돌아봐도 반짝인다. 일이 재밌고 동료들과의 수다의 합이 쫙쫙 맞아떨어지고 충분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업무실적까지!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렇듯이 그 시간을 겪고 있는 그때는 이게 아주 귀한 시간이란 걸 충분히 알지는 못했다.
양평에서의 첫 워크숍, 회사에서 업무향상을 고취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워크숍이지만 동료들은 전부 또래 여자들이고 상사라고 해도 권위 의식 없고 유쾌한, 선배 언니 선배 오빠 같은 분들 이어서 10명 남짓 워크숍은 충분히 끈끈했다. 나를 비롯 신입으로 들어온 우리 동기들은 막내 기수였다. 참,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계절은 가을이었고 우린 차 두 대 나눠 타고 워크숍 장소로 갔다. 양평 시내에 도착해서 장을 봐서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나무에 둘러 쌓인 펜션이었다. 야외 바비큐장에서 바비큐를 굽고 본부장님은 두루치기를 해주셨다. 협력업체 스튜디오에서 잘 놀고 오라며 격려차원에서 보내준 맥주와 소주를 섞어서 마시면서 게임도 하고 수다도 떨고 했다. 그때까지 사무실을 직접 꾸리면서 회식을 해도, 회사 비품을 구입해도 항상 직접 사서 쓰는 자영업자였던 나는 내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회사에서 하는 워크숍에 참석한 거지만 마음만은 그냥 공짜로 먹고 마시는 기분이었다. 0.1만큼도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즐거웠기 때문에 신이 날수 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들이랑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해서 듀오웨드에 평생 다닐 거예요 라고 외쳤던 것 같다. 팔자에 퇴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런 시절이라는 게 원래 오래가는 것이 아니란 걸 누구나 그렇듯 나도 몰랐다.
신입 시절, 아직 경력이 많지 않아서 크고 작은 실수도 하고 노련하지 않을 때에도 고객분들, 행복한 예비부부들은 항상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이에요’ 인사해주셨다. 자식이 결혼하는데 처음 보는 젊은 처자가 같이 따라다니면서 준비를 해주니까 직업이라고 말씀드려도, 이렇게 일하고 월급 받는다는데도 어머님들은 자꾸 고마워하셨다. 그 시절 웨딩플래너란 직업이 생소해서 아마 더 그랬을 것이다.
업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고객응대가 매끄럽지 못해서 성과를 덜 올리고 있던 업체들은 웨딩플래너가 중간에서 부드럽고 전문적인 애티튜드로 고객의 니드를 파악해 소통해주는 것만으로 매출이 오르는 성과를 볼 수 있었다. 특히 퀄리티는 좋은데 평생 처음 결혼을 하는 고객들이 그 퀄리티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어서 선택받지 못했던 업체들은 웨딩플래너의 눈에 들면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열렸던 것이다.
물론, 홍보는 잘하는데 실제 상품, 예를 들면 드레스 소재도 별로고, 신상도 잘 만들지 않고 조악한 레이스나 비즈를 사용하는 집들은 예전에 비해 매출이 떨어지기도 했다. 우린 자주 미세하게 비교해가며 들여다보니까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드레스라도 오전 햇빛 아래, 조명 아래, 여러 다른 체형과 피부톤, 이목구비의 신부가 입었을 때, 그때마다 피팅감이 달랐다. 그런 경험치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레 옥석을 가리는 안목이란 게 생겼다. 그러니 퀄리티가 떨어지는 곳들은 추천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렇게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도와드릴 고객분들이 알아채지 못한 걸 알아봐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일은 즐거웠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과에 들어가고 영상업체를 창업했다가 웨딩 영상을 하게 되고 웨딩 영상 제작을 하면서 웨딩플래너를 알게 되고, 거의 신생 업종이었던 웨딩플래너는 나의 모험심을 자극하기 충분해서 지원하게 되고.... 인생은 알 수 없지만, 지나고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고리들이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 꼬리 안에 있을 땐 안 보이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이렇게 될 일이었다. 청춘을 마구 낭비하던 나는 그렇게 조금씩 진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새롭고 신선한 인풋들이 넘치던 때, 곧 어떻게 나이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인생과 미래에 대해 불안해 미치겠는 시절이 몰아칠지도 모르고 마냥 해맑던 아니, 지나고 보니 해맑은 기억만 남은 시절이다. 그로부터 훨씬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인생의 꼬리를 항공 뷰로 내려다볼 줄 아는 통찰력 있는 지혜는 아직은 갖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