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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희 Sep 13. 2021

그 많던 싱아를 먹어치우던 나날

당신이 늦을 때 나는 즐겼답니다.

박씨네 여자들은 도회지에 못 나가고 집 안팎에서만 뱅글뱅글 돌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아직 어린 ‘나’는 그렇지만 도회지에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다. 다만 함께 있을 때 권력이 막강해지는 할아버지가 출타를 하는 것이 유일한 서러움이었다. 언덕에 올라서 울타리 아래에서 하염없이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나’의 어린 마음이 안쓰럽다가 귀엽고 귀엽다가 애처롭고 했다. 할아버지는 돌아왔고 ‘나’의 유일한 근심은 곧 사라졌다. 동무들과 함께 냇가를 뛰어다니고 숲을 날아다니면서 한 번도 같은 놀잇감을 갖고 놀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마을의 대자연을 그야말로 마음껏 누렸다. 집에서 좀 떨어져 있는 뒷간에 가서 어린 동무 무리들끼리 함께 나란히 엉덩이를 까고 볼 일을 보는 장면을 볼 때는 그야말로 자유, 그 자유와 천진함이 주사 놓은 것마냥 나에게 주욱 입력되는 것 같았다.     

 


 싱아 속 나 말고 현실 속 나는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소품들까지 곁들여진 세련된 공간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마 이루마가 감성이 몰캉몰캉해지는 연주를 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통 창 안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따뜻하고 향긋한 평일 오후 였다. 만나기로 한 신부가 늦는다고 문자를 보내와서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이루마가 흐르는 화려하고 또 쾌적한 그 공간에서 막 내린 커피를 마시면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를 읽던 그날. 쾌청하고 바람이 살랑거렸다. 사실, 그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 드레스샵의 에어컨 바람인지 아니면 창문을 열고 들어온 자연바람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순간의 나는 진짜 박완서 작가의 ‘싱아’ 속에 나오는 어린 ‘나’ 만큼이나 자유를 느꼈던 건 분명하다. 나로서는 사무실에서의 근무 위주로 하지 않는 작업이라 적응하기 더 쉬웠다.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밖으로 싸돌아야 하는 일이어서.

그 후로도 드레스샵에 외근을 갈 때면 항상 5분이라도 더 일찍 도착하려고 애썼고 종종 싱아를 꺼내 먹었다. 


  

약속 시간보다 늦는 신부 덕분에 예쁜 카페같은 드레스샵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 행복한 때가 종종 있다.  신부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만끽한 여유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다.  


 웨딩드레스는 다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디자인이 비슷하다고 해도 소재에 따라 패턴에 따라 몸매가 다르게 표현된다. 여기저기 드레스를 입어보면서 웨딩촬영과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샵을 정하는 일정을 드레스투어라고 한다. 처음에는 드레스투어 씩이나 할 필요가 있겠냐고 생각하던 예비신부들도 막상 드레스투어를 하고 나면 이거 안 하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 숍에서 권해주는 드레스 세 벌을 입으면서

 

‘아 나는 슬림한 드레스가 어울리는구나 오프숄더 드레스가 어울리는구나 레이스가 어울리네요’


했던 예비신부가 바로 다음 드레스숍에서 다른 디자이너가 다른 콘셉트로 추천하는 드레스를 입어보고 나면


‘어머, 저는 정말 풍성한 드레스가 진짜 잘 어울리네요. 첫 번째 샵 드레스는 기억도 나지 않아요’


뭐 대략 이런 반응이 십중팔구이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여자의 경우만 드레스투어를 좋아할 것 같지만 사실 오히려 화장도 안 해보고 평생 털털하게 바쁘게 살아온 예비신부의 경우가 드레스 피팅 후 웨딩드레스에 홀릭되는 경우가 더 많다. 본인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자신과 그런 자신을 보면서 붉어진 남자 친구의 설레는 얼굴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원래 내 쇼핑도 귀찮아하고 여자 친구들끼리 우르르 함께 옷 사러 가는 그런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향이지만(미리 서칭 해두고 가서 첫 집에서 두 세 벌 입어보고 끝! 이런 스타일이다. 대략 아저씨 스타일)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웨딩플래너가 되었다. 웨딩플래너의 여러 일 중에서 어쩌면 가장 주요한 업무 중 하나는 드레스를 함께 고르는 일이다. 평생 덜 골라줬던 친구의 옷 대신 신부의 옷을 매의 눈으로 분석적으로 고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드레스는 오간자 실크 소재여서 부드럽고 가벼운 질감 때문에 6월 결혼식에 입기 좋을 것이고 살짝 둥근 어깨는 가로로 떨어진 오프숄더 때문에 많이 커버가 됩니다. 진주 컬러 같은 크림색이라 까무잡잡한 피부톤과도 잘 어울리고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계시니까 얼굴에 시선이 더 갈 수 있도록 다른 장식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깨끗하고 내추럴한 콘셉트의 화이트 그린 부케를 들어주면 청순하고 세련돼 보이면서 소재 때문에 여름 신부의 싱그러움도 있을 거예요!"

  

드레스마다 이런 식으로 포인트를 짚어서 설명을 하면 그런데 그 설명이 들어맞는다 싶으면 신랑 신부 친정어머님이 웨딩플래너를 보는 눈에 신뢰가 그득하다.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의견을 듣고 싶어 하게 된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고 처음부터 난 드레스투어가 좋았다. 사실, 긴 시간 쇼핑하는 것을 귀찮아했을 뿐 옷은 원래 좋아했었으니까 내게 아주 딱 맞는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감사와 신뢰의 눈빛을 받으며 생전 처음 드레스 입어본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설명하고 아름답고 멋진 드레스와 액세서리들을 보는 드레스투어 때 종종 나는 조금 일찍 샵에 도착했고 가끔 신부가 늦으면 그렇게 나만의 시간을 갖곤 했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허락되지 않은 시간의 즐거움이라 책이 더 맛있다. 아직도 가끔 좋은 날씨에 드레스샵으로 외근을 갈 때면 자연 속에서 자유롭던 어린 박완서의 싱아 이야기를 읽던 그날이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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